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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생활 담은 웹툰 ‘未生’… 샐러리맨들 “이 만화 딱 내 얘기네”

입력 | 2012-10-05 03:00:00

직장인에게 큰 인기




 

윤태호 작가가 경기 성남시 구미동 작업실에서 ‘미생’의 주인공인 장그래 그림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성남=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샐러리맨은 드럼통 위의 널빤지에 서 있는 사람 같습니다. 모두들 불안 속에 살더군요. 직장인 인생의 테마는 무엇인가요?”(윤태호 작가)

이런 질문으로 시작된 만화 ‘미생(未生)’이 직장인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미생은 바둑 프로기사 입문에 실패한 ‘고졸 백수’ 주인공이 대기업 종합상사에 들어가 직장생활을 하며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은 만화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 연재되는 웹툰 가운데 단연 인기다.

다음에 따르면 독자 가운데 대부분은 30, 40대다. ‘직딩(직장인) 필독 만화’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직장인들은 왜 이 만화에 열광하는 걸까. 직장인들과 윤태호 작가를 만나 들어봤다.

○ 2년 계약직 ‘진짜 직장인’의 이야기

대기업 입사 13년차인 김모 차장(40)에게 미생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일본 만화 ‘시마과장’ 얘기를 꺼냈다. 시마과장은 일본이 초고속 성장을 한 1980년대, 대기업에서 평사원으로 시작해 사장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 주인공이다.

“시마과장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라는 사장의 숙제를 받고 읽기 시작했는데 입맛이 씁쓸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공을 목표로 한 경쟁을 강요받는 느낌이었어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반발감이 들었습니다. 직장에 이 만화 같은 ‘혼자만의 성취’는 없습니다.”

시마과장과 달리 미생에는 한 사람의 성공을 그린 영웅담이 등장하지 않는다. 정치판 같은 회사 내 암투도, 오너 2세가 등장하는 러브라인도 찾아볼 수 없다. 치열한 인턴생활을 거쳐 2년 계약직을 겨우 따낸 주인공 ‘장그래’의 눈에 비친 회사는 현실 그 자체다. 일에만 열중하는 과장은 승진과 거리가 멀고, 부하의 공을 빼앗는 부장은 다시 임원에게 공을 빼앗긴다. 회사원 남편을 둔 한 주부는 이 장면을 본 뒤 ‘남편의 인생을 이해하게 해줘 고맙다’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

 

○ “혼자만의 땀방울로 되지 않는 현실”


바둑에서 얻은 통찰력으로 사무실의 파일 정리 방식을 나름대로 개선한 인턴사원 장그래를 앞에 두고 그의 상사인 김동식 대리는 칭찬을 하는 대신 혼쭐을 낸다.

“내가 정해서 준 파일 구성은 이 회사 매뉴얼이야. 모두가 같은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고. 당신이 이렇게 고치면 문제 있을 때 당신에게 문의해야 하나? 혼자 하는 일 아닙니다. 명심해요.”

만화는 ‘매뉴얼대로 일해야 하는’ 대기업의 실체를 정확히 비춘다. 절차를 어기고 좌충우돌하며 큰 계약을 따내는 영웅은 없다. 만화 속 부장은 더이상 ‘수출 역군’ ‘대기업 상사맨’이라는 이름만으로 폼 나지 않는 현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누구 한 명의 땀방울로 되고 안 되는 시절이 아냐.”

○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게 완생의 길”

만화 속 장그래는 보고서의 전문용어 하나하나를 치열하게 익히며 회사에 적응해 나간다. 보고서 작성법을 묻는 장그래에게 선배 직원은 보고서에 작성자의 혼(魂)을 담아야 한다며 이렇게 가르친다. “누군가가 이 계획서를 믿고 밀림을 지나야 할지 모르는데 스스로 설득되지 않은 기획서를 올리는 것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죠.”

장그래와 달리 시스템과 절차를 무시하고 지름길과 편법을 선택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극 중 박종식 과장은 초년병 시절 큰 성과를 쉽게 거뒀다. 그러자 모든 시스템과 절차가 시큰둥해졌다. 그러다보니 ‘일은 내가 하고 회사가 돈을 버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유령회사를 만들어 이익을 빼먹던 그는 결국 비리가 드러나 쫓겨난다.

선배의 잘못을 들춰낸 장그래는 “바둑에서 반집 승을 거뒀을 때, 그제야 순간순간 성실하게 한 집씩 챙긴 한수 한수의 소중함이 느껴졌다”며 “순간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되뇐다.

미생이 말하는 직장인의 삶의 테마는 여기에서 발견된다. “직장인이건 회사의 오너이건 간에 모든 것을 만족하는 ‘완생(完生)’이란 없다. 만족이 안 되는 것을 잘 관리하면서 가치 있게 사는 게 완생을 향하는 길”(윤태호 작가)이라는 것이다.

극 중 김동식 대리는 이렇게 말한다. “남들이야 우리더러 넥타이 부대니 일개미니 하지만 나 하나쯤 어찌 살아도 사회는, 회사는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이 일이 지금의 나야. 내 일이니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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