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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진주성 촉석루

입력 | 2012-10-06 03:00:00

논개의 눈물은 의암을 타고 흘러 남강을 적시고···




경남 진주를 찾는 여행객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은 진주성이다. 남강 절벽을 따라 쌓은 성곽은 절벽의 위엄을 한층 돋보이게 만든다. 그 풍경의 절정에는 촉석루(矗石樓)가 있다. 그 이름은 강가에 뾰족 솟은 바위 위에 만들어진 누각이란 뜻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이 거대한 누각은 진주성의 지휘소다. 평화로울 때에는 과거 시험장으로 쓰였다. ‘북에 평양 부벽루(浮碧樓)가 있다면 남에는 진주 촉석루가 있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촉석루는 1365년 고려 공민왕 때 처음 세워져 여러 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18년 다시 세워졌지만 안타깝게도 6·25전쟁 중 또다시 불탔다. 지금 누각은 1960년에 재건된 것이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두 차례에 걸쳐 왜군과의 전투가 벌어진 무대였다. 여기서 촉석루의 역사적 깊이를 더하는 한 여인의 순절(殉節)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주인공은 바로 논개(論介)다.

○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던 1593년(선조 2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했다. 1차 전투에 이어 1년도 안 돼 다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로 관군과 의병 등 모두 7만여 명이 희생됐고 성은 왜군에 함락됐다. 승리감에 도취한 왜군은 진주성 촉석루에서 자축 술판을 벌였고, 이때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촉석루 아래의 바위로 유인해 강으로 함께 몸을 던졌다. 이를 계기로 왜군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논개가 기생이 아니라 양반의 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논개는 원래 최경회라는 의병장의 후처였는데, 남편이 전투에서 숨지자 그를 따르려 관기로 가장한 채 연회장에 들어가 의로운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다. 구전에 따르면 논개는 당시 열 손가락에 모두 가락지를 끼고 있었다고 한다. 강물로 뛰어들 때 왜장을 끌어안은 손이 미끄러져 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논개의 죽음은 사후 꽤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진주 사람들은 해마다 논개의 혼을 위로했다. 조정은 1721년이 되어서야 논개의 문제를 논의했고, 결국 그를 의기(義妓)로 인정했다. 논개의 자손들은 특전을 받았고, 바위 근처에는 사당이 세워졌다. 그가 순국한 바위에는 아직도 ‘의암(義巖)’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 고운 유등 불빛 가득한 촉석루

오랜만에 가본 촉석루에는 시원한 강바람이 불고 있었다. 강 너머 펼쳐진 진주 시가지는 많이 변해버린 듯했다. 논개가 몸을 던진 남강만이 변함없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도 여러 시판(詩板)이 걸려 있는 촉석루에는 일찍이 많은 묵객(墨客·먹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들렀다. 오늘날 그 자리는 진주시민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외형적으로 도시는 급속하게 변해 왔지만, 역사라는 시간의 지층이 고스란히 쌓여 삶의 주변에 남아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지금 남강에는 유등(물 위에 흘려보내는 등)축제가 한창이다. 그 옛날 논개도 한 사람의 아내로 부군과 함께 이 강가를 거닐지 않았을까. 그때는 어두웠을 남강의 야경이 오늘날 고운 유등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한 걸, 그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적요한 남강의 푸른 물결이 더없이 깊게 느껴졌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 바로잡습니다 ▼

◇본보 6-7일자 B6면 ‘이장희의 스케치 여행’ 중 ‘유등’ 의 뜻은 ‘기름으로 켠 등(油燈)’ 이 아니라 ‘물 위에 흘려보내는 등(流燈)’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