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철(1956∼ )
밥집 마당까지 내려온 가을을
갑자기 맞닥뜨리고
빌딩으로 돌아와서
일하다가
먼 친구에게 큰 숨 한 번
내쉬듯 전화한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니
좋다고
불현듯 생각한다
가을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와 있어서
그를 그렇게라도 보내게 한다
시에 ‘아무것도 아닌’이 세 번 나온다. ‘아무것도 아닌’의 반대말은 ‘가치 있는’일 것이다. 예컨대 능력, 매력, 쓸모, 근면, 이익, 부귀, 영화, 명성, 권력 등등의. 뭇사람이 이 말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획득하려 애쓰는 건 다행한 일이다. 그 지향과 노력으로 이 세상이 무사히, 믿음직스럽게 굴러가는 것일 테다.
그런데 쓸쓸하고 가슴이 허전할 때, 우리의 마음은 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우는 것일까?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와 있’는 가을한테 들어보자.
화자가 친구와 나눈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는 필경 유쾌하거나, 은근하고 다정했을 테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침울하고 암담하게 나누고 있을 사람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매우 드물 것이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