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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숭고한 희생 뒤에 가려진 핏빛 본질

입력 | 2012-10-09 03:00:00

폴란드 연극 ‘(아)폴로니아’ ★★★★




맏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시킨 아가멤논과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 부부에겐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까지 3명의 자녀가 있었다. 유대인 24명을 구하려다 숨진 아폴로니아에게도 3명의 자녀가 있었다. 두 작품을 연결한 ‘(아)폴로니아’에선 어린이 연기자를 마네 킹으로 대신하면서도 마리오네트 연기와 영상효과로 ‘침묵하는 희생자’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구축했다. 한국공연예술센터 제공

희생은 핏빛의 단어다. 오늘날 희생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는 숭고한 행동으로 각인돼 있다. 하지만 이 거룩한 단어에는 ‘살인의 추억’이 숨어 있다. 본디 희생이란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서 소와 양 같은 가축뿐만 아니라 인신공양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 개막작으로 5∼7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폴란드 연극 ‘(아)폴로니아’는 이런 희생의 핏빛 이면을 인정사정없이 들춰낸다. 제목에서 (아)를 뺀 폴로니아는 라틴어로 폴란드를 뜻하고, 아폴로니아는 19세기 러시아식민통치 시기 이에 저항하는 의미로 쓰인 여성 이름이다. 아폴로니아는 또한 이 연극에 영감을 불어넣어준 폴란드 소설가 한나 크랄의 동명 소설 속 여주인공이기도 하다.

자, 그렇다면 이 작품은 강대국의 희생양이 됐던 폴란드의 슬픈 역사를 다뤘을까. 1990년대 폴란드 연극의 새로운 기수로 떠올랐던 연출가 크시슈토프 바를리코프스키(50)는 그런 단순한 통념에 도전한다.

아폴로니아는 나치 치하 폴란드에서 유대인 24명을 돌봐준 죄로 처형된 폴란드 여인이다. 하지만 연극은 결코 그 영웅적 행동을 찬미하지 않는다. 연극은 오히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나치독일의 폭력뿐 아니라 아폴로니아가 그처럼 보호하려 한 유대인의 학살을 방관했던 대다수 폴란드인까지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 비판에 이르기 위해선 수많은 텍스트의 숲을 지나야 한다. 2시간 반짜리 1막의 등뼈가 되는 텍스트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과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다.

두 작품에는 무고한 여성 희생양이 등장한다. 첫째는 트로이전쟁의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딸이지만 제물로 바쳐진 이피게네이아다. 둘째는 가족 중에서 대신 죽어줄 사람을 찾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된 남편 아드메토스 대신 죽음을 택한 그의 아내 알케스티스다.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이 강요된 죽음이라는 점에서 고대적 희생이라면 알케스티스의 희생은 자발적이란 점에서 현대적 희생에 가깝다.

하지만 바를리코프스키는 다양한 연출 방식으로 이 둘의 차이를 지워간다.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포장된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은 남편 살해와 친모 살해라는 패륜을 잉태했다. ‘사랑을 위한 희생’으로 포장된 알케스티스의 희생 역시 자신의 생명연장을 위해 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드메토스의 이기심이 초래했다.

연극은 고대와 현대의 시간적 간극을 줄이는 방식으로 그 동질적 폭력성을 고발한다. 등장인물들은 식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는 현대적 가족이며 끔찍한 희생이 이뤄지는 공간 역시 거실 아니면 화장실이다.

1936년 발표된 폴란드 가요 ‘마지막 일요일’과 더불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들로 관객의 폐부를 찌른 여배우 레나테 예트.

무대에서 직접 캠코더를 든 스태프가 근접 촬영한 영상은 가족을 희생시키거나 가족에게 배신당한 인물의 고통을 그로테스크하게 확대해 보여준다. 살육이 끝난 뒤 록밴드의 연주와 함께 울려 퍼지는 노배우 레나테 예트의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노래 가사 역시 희생을 숭고하게 기억하려는 관객의 무의식을 해체한다.

고대의 희생을 다룬 1막의 의미는 남아공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쿳시의 소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와 크랄의 소설 ‘아폴로니아’를 주요 텍스트로 다룬 2막을 만나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소설 속 코스텔로의 강연을 살짝 변형시킨 연설은 15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폴란드 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를 언급하면서 이 사태에 대해 생존을 위해 ‘자의적인 무지’를 택한 폴란드인 전체가 ‘영혼의 병’에 걸렸다고 질타한다. 그리고 희생의 본질이 핏빛 폭력이라는 통찰은 인간을 위해 동물에게 가해지는 무차별적 폭력으로까지 확대된다. 뿐만 아니다. 아폴로니아의 아들은 엄마를 추모하는 연설에서 엄마에 대한 미움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남겨진 자식들에게 엄마의 희생은 지울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준 또 다른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모호한 제목의 숨은 뜻이 드러난다. 유례없는 영혼의 죄악이 자행되고 묵인된 공간으로서 ‘폴란드에 대한 부정’(아·a는 부정접두어로도 쓰인다)인 동시에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죄의식을 통해 정화된 공간으로서 ‘폴란드에 대한 염원’이 함께 담긴 게 아닐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