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도서관장
‘얼치기 좌파’처럼 일방적 미화 안해
선생은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 불렸지만 그런 표현을 한참 넘어선 분이다. 무엇보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공산권의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했고 경제적 결정론과 같은 도식을 거부했다. 인간의 의식과 문화를 경제조건 못지않게 중시했다. 구소련에서 선생의 저서가 한 권도 출간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생은 평범한 사람들을 연구하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개척한 선구자다. 1950년대까지 역사연구의 주제는 엘리트였는데 선생은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밝히는 어려운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역사학의 방향을 바꿨다. 영국 노동계급, 이탈리아 농민반란, 라틴아메리카 의적이 선생 덕분에 살아났다. 그렇다고 얼치기 좌파 학자들처럼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선생은 사람들을 저항으로 몰고 간 상황을 분석하고 고발했지만 저항하는 사람들의 무모함과 잔인함에도 눈감지 않았다. 진정한 역사학자의 모습은 그런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선생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혁명의 시대’로부터 ‘극단의 시대’로 이어지는 근대세계에 대한 서술이다. 특히 선생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이중혁명’이라 명명한 이래 그 개념은 근대사회를 분석하는 확실한 기준이 됐다. 선생은 한 국가가 아니라 전 지구적 역사를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을 가까이 접한 사람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선생의 지식과 호기심에 감탄하곤 했다.
나는 1982∼83년 박사학위 논문 자료 수집차 런던에 1년간 머물렀을 때 선생과 첫 인연을 맺었다. 내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선생도 가을 학기마다 가르쳐 강의도 들었다. 1987년 봄 한국에 오셨을 때에는 강연 통역도 하고 경주여행에도 동행했다. 당시 선생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억제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지만 동시에 급속한 근대화에 감탄했고 ‘네가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 태어난 것은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생전에 약자에 대한 따뜻한 이해 강조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