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경 여사 “윤대비마마 앞에서 노래하던 때 엊그제 같은데…”
일곱 살 적 이해경 여사. 옆에 순정효황후가 선물한 ‘블란서 인형’이 있다. 이해경 여사 제공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덕궁 낙선재는 체험학습을 하러 온 학생들로 바글거렸다. 이 건물은 본디 국상(國喪)을 당한 왕후들이 소복을 입고 은거하던 곳. 1926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874∼1926)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정실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별세하기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단청도 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의 낙선재와 시끌벅적하게 이곳을 돌아다니는 학생들을 한참 바라보던 이해경 여사(82)는 어릴 적 윤 황후와의 추억을 털어놓았다. 고종의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1877∼1955)의 다섯째 딸인 이 여사는 윤 황후를 떠올릴 때마다 꼬박꼬박 ‘대비마마’라고 칭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뵌 적이 없을 정도로 엄격하고 무서운 왕실 최고의 어른이셨지만 유독 내게만은 자상하셨다”고 그는 회고했다.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이 여사는 ‘조선왕조 마지막 왕녀’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고궁박물관 초청으로 지난달 27일 방한했다. 박물관은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문화유산 멀티서비스 ‘헤리티지 채널’과 함께 창덕궁, 운현궁 등 이 여사의 추억이 담긴 고궁 곳곳을 돌아다니며 조선 왕실에 대한 그의 기억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1930년에 태어난 이 여사는 당시 서울 종로에 있던 의친왕 사저 사동궁(寺洞宮)에서 왕실 법도를 지키며 살았다. 광복 후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음악교육과를 졸업했으며 1956년 몰락한 왕가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뉴욕 컬럼비아대 동아시아도서관 한국학 사서로 27년간 일했고 1997년엔 책 ‘나의 아버지 의친왕’을 출간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대한제국 훈장을 아궁이 밑에 묻으며 한참을 울었어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운현궁 노안당을 방문한 이해경 여사.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던 이곳은 이 여사의 오빠인 이우 왕자(1912∼1945) 가족이 살아 어릴 적 자주 왕래했다고 한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귀영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조선왕실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이 여사의 증언은 조선왕실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여사는 “한때는 대한민국 정부에 섭섭한 점도 있었지만 이젠 다 고마울 뿐이다”라며 “다만 왕가의 종손이 제사를 모시는 등 왕실의 전통을 잘 지킬 수 있게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