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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한줄]눈치 보며 살지마

입력 | 2012-10-13 03:00:00


《 “너는 얼굴이 주인공 얼굴이야”‘

-써니’(2011년)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이면 숙취보다 전날 밤 내가 떠들었던 얘기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어떤 얘기들은 몇 년이 지나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아 자다가 이불 여러 번 걷어차게 만들었다. ‘오늘은 떠들지 말고 얌전히 술만 마셔야지’라는 결심도 별 소용이 없었다. 알코올과 그 약리작용이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알코올은 자제력을 살짝 무너뜨리는 역할만 했다. 그러면 금이 간 제방에서 강물이 쏟아져 나오듯이 자아(自我)가 쏟아져 나왔다. 작은 그릇 속에서 탈출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거대한 에고가. 남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여드름쟁이 15세 소년이.

그에 대한 혐오, ‘나 참 한심한 놈이구나’ 하는 자각, 스스로에게 고통을 줘서 가상의 평형 상태를 맞추고자 하는 시도 역시 철부지 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나와 정신 연령이 비슷한 남들의 행동을 보면서 간신히 깨닫게 됐다―특히 ○○아, 네 미니홈피가 큰 반면교사가 됐다). 그랬다. 자기비하, 자기혐오, 자기학대 역시 여드름쟁이 15세 소년이 자주 빠지는 정신 상태였다. ‘자기’라는 접두어가 붙은 심리는 결국 모두 자의식 과잉의 산물이며, 자기애(自己愛)가 왜곡된 형태다.

첫 번째 아이러니는, 그런 심리가 건강한 자신감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15세짜리 소년만큼 남의 눈을 의식하는 인간도 없기 때문이다. 딱하고 애처롭다.

‘미쓰 홍당무’(2008년)의 양미숙 선생(공효진)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들을 저지르는 걸까. 그가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라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기 때문에? 아니다. 영화 뒷부분, 양 선생이 서종희(서우)에게 하는 말에 답이 숨겨져 있다. “나는, 내가 창피해.” 그는 자의식이 너무 크고 자존심이 세서 그런 짓을 해온 거다.

두 번째 아이러니는,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자아를 배려하는 문화(분위기)가 늘어날수록 구성원 개개인은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기회를 잃는 것 같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도로 사정이 좋아지고,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디자인은 점점 더 멋있어지는데, 차의 내구성은 점점 더 약해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예전에는 어지간한 정신의 정면충돌에도 ‘탑승자’가 큰 내상을 입지 않았는데, 요즘은 사소한 접촉사고에도 그 안의 멘털이 쿠크다스 과자처럼 부서진다(게다가 주변 사람들이 다 차에서 내려서 흘끔흘끔 그 광경을 구경한다―아닌 척하면서).

어떻게 할 것인가? 차라리 자기를 잊어버리고 살고 싶은가? “난 꽤 오랫동안 엄마, 집사람으로만 살았거든”이라고 말하는 ‘써니’(2011년) 속 어른 나미(유호정)의 모습이 덜 애처롭고 더 바람직한가? 아니다. 자의식이 흘러넘치는 삶은 우스꽝스럽지만, 자의식이 없는 삶은 삶이라 부를 수가 없다.

이에 대해 내가 들어본 최고의 답변은 어른 나미에 대한 어른 춘화(진희경)의 대꾸였다. “너는 얼굴이 주인공 얼굴이야.” 너는 주인공으로 태어났어. 누가 뭐래도 너는 네 인생의 주인공이야. 네가 주인공이 돼도 좋으냐고 남들의 인정을 구할 필요도, 주인공을 시켜달라고 관심을 구걸할 이유도 없는 거야. 남들이 무시하고 외면하고 손가락질해도 주인공은 너인 거야. 주인공에게는 그런 시련도 오는 거야.

8월에 술을 끊었다. 퇴근 뒤 집에서 불 끄고 혼자 마시는 맥주도 독하게 마음먹고 끊어버렸다. 술을 줄이는 건 할 수 없었고, 끊는 것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극단만 오가는 것도 유치한 성격 탓이고,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회피한 거라고 지적받아도 할 말은 없다. 넘치는 자의식을 당장 어찌할 수는 없으니 가면이라도 튼튼한 걸 쓰고 살겠다.

tesomiom 남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37세 지성피부입니다.

tesomio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