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손자, 손녀들까지 둘러앉은 밥상은 차려준 대로 먹는 교육현장이나 마찬가지다. 3대가 어울려 한끼를 먹다보면 반찬투정은 사라지고 가족의 정은 깊어진다. 동아일보 DB
표를 달라 할 것이면, 후보가 상인에게 음식을 먹여도 시원찮을 판에,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이 장면을 보면서 인상 찌푸리는 국민은 없다. 지지하는 후보가 음식을 잘 받아먹을수록 속으로 흐뭇하게 여긴다. 국민의 그 마음을 우리 할머니의 말투로 표현하면 이렇다. “아이고, 내 새끼. 주는 대로 잘도 받아먹네. 쭛쭛.”
○ 사랑이란 이름으로 주는 음식
인간이 태어나 처음 먹는 것은 어미의 젖이다. 어미의 품에 안겨 어미의 젖을 빠는 것만으로 어미는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젖 떼고 이유식을 먹을 때도 그렇다. 잘 받아먹는 만큼 어미는 행복하다. 더 자라 스스로 숟가락질을 한다 해도 얼마 동안은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어 먹이는데, 넙죽넙죽 받아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 한쪽이 뿌듯하다.
청년이 되면 음식을 먹이고 먹는 관계가 부활한다. 어미와 자식 간에 이 관계가 다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짝이 생기게 되고, 이들끼리 음식을 먹이고 받아먹는 관계가 형성된다. 연인끼리 삼겹살 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고 침 발라 먹던 아이스크림도 먹으라고 준다. 어미가 아무리 먹이려 하여도 머리를 쌀래쌀래 저었던 그 아이가 다 자라 그의 연인 앞에서 어미와 하던 그 행동을 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사랑이란 별 거창한 정신적 활동이 아니다. 타인의 삶을 대가 없이 무한히 책임지려는 행위이다. 이 무한 책임의 감정은 젖먹이일 때 처음 인간의 마음에 들어온다. 어미 품에 안겨 젖을 빨 때, 웬만큼 자라서도 어미가 이것저것 챙겨 먹일 때, 그 음식을 먹으며 사랑이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내 삶을 지탱시켜주는 어미의 젖과 음식이 사랑임을 뇌의 저 아래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가, 청년이 되어 연인을 만나게 되면 그 유사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젖먹이 때 자신의 어미가 그렇게 했듯이 연인에게 음식을 먹이며 “네 삶을 책임져 주마” 하는 것이다.
○ 신세대 음식을 먹어 보자
사랑은 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주는 것을 잘 받아들이는 상대가 있어야 사랑이 성립한다. 아니다. 근원적으로는 (젖을, 음식을, 나아가 마음을) 받아먹을 수 있는 상대가 없으면 사랑이라는 감정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사랑을 받는 것에는 소홀하다. 어미가 주는 대로 아무 의심 없이 넙죽넙죽 잘 받아먹던 아기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어미가 너무나 행복해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주는 대로 먹겠다.” 우리가 아기일 때는 다 이랬다. 그래서 어미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하였고 행복하였다. 시장의 대선후보들은 아기 흉내를 내며 국민들에게서 사랑을 훔치려 하고 있다. 그래야 표를 준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아는 것이다. 극악한 인간관계의 정치판에서도 사랑을 이용하고 있는데, 우리의 일상사에서는 왜 이게 부족한지. 받아먹기만 잘해도 사랑이 충만할 것이거늘.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blog.naver.com/foodi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