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온사인
―송승환 (1971∼)
저무는 태양이 차례로 회전문 통과한 사람들 그림자를 붉은
담장에 드리운다 갓 돋아난 초록 이파리 검게 물들어간다 곧장
침대로 가기 꺼려하는 여인은 포도주의 밤을 오랫동안 마신다
공장 폐수를 따라 하얗고 둥근 달은 강으로 흐른다 언제나 우리
들은 그 가늘고 긴 새벽의 유리관 전극 속으로 사라진 불의
문자(文字) 아래로 걸어간다
‘저무는 태양이 차례로 회전문 통과한 사람들 그림자를 붉은/담장에 드리운다’
문득 시간이 정지하는 듯한, 대도시 저녁의 고요히 설레는 한 풍경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도입부! 일품이다. 이리 서정적인 구절이 정작 안내하는 세계는 삭막하다. 거기는 아마도 밤의 서울. 때로 위생적인 어둠이 그립기도 하지만, 그러나 불빛 가득한 그 밤들에 길들고 정든 우리. 집에 돌아갈 시간을 미루고 늦도록 거리를 흘러 다닌다. 저마다 하나하나의 별처럼 밤을 비추는 네온사인들. 우리는 그 빛의 상냥한 유혹을 좇아가 닭갈비를 뜯고 맥주거품을 핥으리. 그리고 어느 별빛 아래서 누구는 사랑을 나누리. 네온의 사인이 가늘고 긴 새벽의 유리관 속에서 희미해질 때까지.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