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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joy]익산 금강 곰개나루길

입력 | 2012-10-19 03:00:00

꽃담 돌아, 석비레담 지나, 사스락담 너머 고향이 보이네



웅포 곰개나루에서 바라본 금강. 망양정 앞 저 멀리 황포돛단배가 보이는 곳이 충남 서천군 신성리다. 금강하구는 탁 트여 벙벙하다. 왼쪽으로 더 내려가면 군산과 서천을 잇는 하굿둑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부여와 웅포를 잇는 웅포대교가 있다. 곰개나루는 이른 새벽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천지가 아득하다. 해질 무렵엔 핏빛으로 붉게 물든 노을이 황홀하다. 저문 강변엔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웃고 있다. 강바람이 맑고 차다. 익산=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시도 사랑도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강물이 어떻게 모여 꿈틀대며 흘러 왔는지를

푸른 멍이 들도록

제 몸에다 채찍 휘둘러

얼마나 힘겨운 노동과 학습 끝에

스스로 깊어졌는지를

내 쓸쓸한 친구야

금강 하구둑 저녁에 알게 되리

이쪽도 저쪽도 없이

와와 하나로 부둥켜안고

마침내 유장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

서해 속으로 발목을 밀어 넣는 강물은

반역이 사랑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한꺼번에 보여줄 테니까

-안도현 ‘금강 하구에서’ 부분》

금강은 부드럽다. 푸른 비단결처럼 그윽하게 흐른다. 가을 금강하구는 ‘푸른 멍’이 든 것처럼 깊고 옴팡지다. 밤새 두런두런 강물 뒤척이는 소리가 아련하다. 서해바다 짠바람이 담백한 강물에 씻겨 금세 선선한 바람이 된다. 찌르르∼ 찌르르∼ 둔치 갈대숲 풀벌레소리가 저릿하다.

익산 곰개나루길은 함라마을 삼부잣집에서부터 시작된다. 꽃담이 단아하게 웃으며 반긴다. 고샅길이 정갈하다. 붉은 황토와 흑갈색 울퉁불퉁한 돌들이 어우러져 꽃담장이 됐다. 보기만 해도 정겹다.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돌죽담이 많다. 돌로만 쌓은 강담도 가끔 보인다. 붉은 황토에 짚을 섞어 쌓은 흙담도 있다. 흙벽돌을 구워 쌓은 전돌담이 가지런하다. 차라리 남도에 흔한 탱자나무울타리가 눈에 잘 띄지 않아 이상하다.

황토반죽 사이 돌멩이를 마주 놓아, 겹으로 쌓은 맞담이 앙증스럽다. 가끔 돌 많이 섞인 푸석푸석한 흙, 즉, 석비레로 쌓아올린 석비레담벼락도 보인다. 조해영 가옥의 집채둘레 밑동(징두리) 돌쌓기도 눈에 밟힌다. 사랑채 지붕합각(合閣·팔작지붕 측면의 삼각형 벽)에 기와를 박아 한 송이 다소곳한 꽃을 이뤘다. 마을 곳곳엔 자질구레한 돌들로 쌓은 사스락담(잣담)이 소박하다.

김안균 가옥 담장은 높다랗다. 340m에 이를 정도로 길기도 하다. 담 너머로 집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문은 굳게 잠겨 있다. 한순간 울컥 반감이 솟는다. 뭐가 그리 감출게 많을까. 그러다가 꽃담문양을 보면서 스르르 사그라진다. 집을 짓다 쓰고 남은 기와 조각을 박은 디새죽담이 보면 볼수록 푸근하다. 암키와로 꽃줄기를 만들고, 수키와를 ‘두 손 모은 듯’ 갸름하게 박아 꽃을 피웠다.


‘흙돌 반죽 돌죽담에 꽃수 놓은 예쁜 꽃담/깨진 기와 담에 박은 디새죽담 보기 좋네/돌멩이를 배 맞추어 마주 쌓은 맞담이요/석비레로 쌓았으니 이름조차 석비레담/담벽 아랜 수북하게 돌무더기 밑뿌리요/작은 돌을 포갰으니 보말담이 그것이라/자갈돌을 쓸어 모아 차곡차곡 사스락담.’

-이동순의 ‘담타령’에서


길은 함라산(236m)으로 이어진다. 애기단풍나무가 살짝 물들기 시작했다. 산밤은 이미 흐벅지게 벌어져 곳곳에 기름이 자르르한 알밤들을 터뜨려놓았다. 황갈색 소나무 바늘잎이 길바닥에 가지런하다. 곳곳에 야생 차나무들이 하얀 꽃을 덕지덕지 달고 있다. 그렇다. 함라산은 야생차 북방한계선(36도03분)이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어 언제까지 이 한계선이 유지될지 모를 일이다.

함라산은 야트막하지만 높다. 평지돌출한 산이다. 서해바다와 불룩한 금강 하구, 누런 시루떡 벌판이 발아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서해바다 군산과 장항, 서천이 저 너머에 뚜렷하다. 웅포대교 건너 부여 땅이 손에 잡힐 듯하고, 돌아서면 익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봉수대가 왜 이곳에 있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함라산을 내려오면 곰개나루에서 성당포구까지(14.3km) 금강을 따라 걷는 길이다. 웅포 곰개나루 노을빛이 황홀하다. 웅포(熊浦)는 ‘금강 물을 마시고 있는 곰 머리의 형상’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덕양정 앞강에는 요트가 오가고, 서천 신성리에서 출발하는 황포돛단배가 유람객을 싣고 한가롭게 떠다닌다.

웅포 곰개나루에서 금강하굿둑까지는 바다처럼 벙벙하다. 겨울엔 가창오리떼가 이곳에 묵는다. 해질 무렵 함라산 너머 들판의 낟알을 먹으로 일제히 비상한다. 곰개나루 위쪽은 병목처럼 잘록하다. 익산시청 해설사 유칠선 씨(52)는 “아마도 이곳이 고려 우왕 6년(1380년) 최무선 장군이 왜구의 배 500여 척을 격침시켰던 진포대첩의 현장일 것”이라고 말한다.

1929년에 세워진 ㄱ자형 한옥 두동교회.

성당포구 500년 늙은 은행나무가 올해도 은행알을 주저리주저리 매달고 있다. 6600m²(약2000평)의 고란초 야생 군락지도 코앞이다. 1929년 세워진 두동교회 한옥 예배당도 놓칠 수 없다. 1915년 지어진 김제금산교회 한옥 예배당과 비슷하다. ‘ㄱ’자형으로 꺾이는 곳의 설교대를 중심으로 남녀 좌석이 서로 볼 수 없도록 돼 있다. 박정호 장로(87)는 “안면도에서 금강송을 싣고 가는 배가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했는데, 마침 그 배의 목재가 성당포구까지 떠내려 와 그걸 사서 지었다”고 말한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아무데나 정들면 못살 리 없으련마는/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장독대마다 질그릇 조각만 남았으나/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봅시다.’

-가람 이병기·1891∼1968 ‘고향으로 돌아가자’에서

1611년 유배온 미식가 허균, 주린 배 움켜쥐고 음식 이야기 남겨

■ 함라마을

조선의 풍운아 허균(1569∼1618)은 자유분방했다. 사명당 등 당시 스님들과 허물없이 지내는가 하면 서자 출신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명색이 선비인데도 염불이나 참선에 심취했다. 절에 가면 천연덕스럽게 불공을 드렸다. 남녀관계도 거리낌이 없었다. 임지에 기생을 데리고 가서 살림을 차렸다.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인데, 그보다 한 등급 아래인 성인의 뜻이 뭐가 중요하냐는 것이다. 결국 그는 20여 년의 벼슬살이 동안 유배 3번, 파직 6번을 당했다.

1611년(광해군 3년) 마흔 둘의 허균은 전라도 함열(현 수동마을 어린이집 자리)로 유배를 왔다. 조선시대 함열현은 현재 ‘익산시 함열읍’과는 다르다. 당시 함열현은 요즘 함라면 소재지인 함라마을(교동, 안정, 수동, 천남, 행동, 감마 6개 동네)이다.

허균의 죄목은 과거시험관으로서 조카, 조카사위를 부정 합격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객사에서 1년여를 귀양살이하며 자신의 문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 안에 도문대작(屠門大嚼)이라는 음식칼럼을 넣었다.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는 뜻이다. 옛날 조선팔도를 유람하며 먹었던 맛난 음식들을 되새겨 보며, 넘치는 식욕을 다스려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내가 죄를 지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니 지난날에 먹었던 음식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다. 먹는 것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다. 더구나 음식은 생명과 관련된다. 이곳 함열 관사는 낮고 비좁으며 민가는 대개 띠로 지었다. 쌀겨마저 보기 어렵다. 상한 생선이나 들미나리, 감자가 고작이다. 그것조차 먹지 못하는 날이 많다.’

그렇다. 허균은 천하의 식객, 미식가였다. 강릉부사였던 아버지(허엽·1517∼1580) 덕분에 진귀한 음식을 먹고 자랐다. 세 살 적 맛은 여든까지 간다. 그는 글로써 전국의 맛집을 두루 섭렵했다. ‘한양도성 창의문 밖에선 두부를 잘한다.’ ‘내 고향 강릉은 노인들 풍에 좋은 방풍죽이 일품이다.’ ‘개성은 석이버섯떡이 정말 맛있다.’ 전주 백산자, 안동 다식, 경주 약밥, 평안도 왕만두…. 허균은 117종의 음식을 글로 지어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함라마을, 흉년들면 전국의 걸인 - 풍각쟁이들 몰려들어

■ 삼부잣집

열두 대문집 ‘조해영 가옥’의 십장생벽돌꽃담.

1945년 광복 후 이승만 박사(1875∼1965)는 서울 돈암장, 이화장에서 자리를 잡았다. 김구 선생(1876∼1949)은 경교장에서 살았다. 당시 부자들이 거처를 마련해 준 것이다. 이화장은 한국 최초의 보험사인 대한생명보험회사를 세운 황해도 출신 강익하(1897∼1954)가 주인이고, 경교장은 노다지 광산 재벌로 유명한 평북 출신 최창학(1891∼1959)의 집이었다.

남로당 당수 박헌영(1900∼1955)은 1945년 8월 20일 혜화장에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당시 박헌영이 묵고 있었던 혜화장은 누구의 집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북 함열 부자 김해균(1910∼?)의 서울 2층집이었다. 함라마을 삼부잣집 중 김안균 가옥이 바로 그 집안이다. 김안균과 김해균은 형제다.

김해균은 박헌영의 경기고 후배이자 정치적 동지, 재정 후원자였다. 도쿄대를 졸업하고 당시 보성전문학교 영어강사를 하고 있었던 최고 인텔리. 후에 박헌영과 함께 월북했지만, 남로당 출신으로선 드물게 숙청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김안균 가옥은 전북에서 가장 큰 99칸 옛집(대지 7649m²·2314평, 건평 620m²·188평)이다. 1922년 김안균의 부친 김병순이 백두산 소나무로 안채 사랑채를 지었다. 한옥과 일본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보존도 잘돼 있지만 후손들이 꺼려 집 안을 들여다보기가 힘들다.

1918년에 지어진 조해영 가옥은 ‘열두 대문 집’으로 불릴 정도로 컸다. 궁궐 짓는 도편수가 3년 걸려 지었다 한다. 사랑채 안채가 이어진 몸채와 일본식 별채, 문간채만 남아 있다. 집 입구엔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던 조선중기 영의정 김육(1580∼1658)을 기리는 불망비가 눈길을 끈다.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십장생벽돌꽃담이 볼만하다. 학, 사슴, 거북, 대나무, 소나무, 해와 구름, 영지, 포도, 연꽃 등의 문양이 소박하면서도 우아하다. 경복궁 대조전 뒤뜰의 굴뚝꽃담을 본뜬 것이다.

누룩장사로 부를 이뤘다는 이배원 가옥은 1917년 지은 것. 돈이 너무 많아 엽전을 가득 실은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배원의 큰아들 하당 이집천(1900∼1959)은 서예가로도 유명하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 개운사의 ‘四海白蓮(사해백련)’, 익산 웅포 ‘崇林寺(숭림사)’ 현판글씨를 썼다. 이배원 가옥은 현재 안채 사랑채만 남아 있다. 원불교 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함라마을(함라면 소재지)은 만석꾼이 한 동네에 셋이나 있었던 곳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우선 호남평야의 너른 들판이 뒷받침이 됐다. 그만큼 벌판이 넓어 만석꾼 셋이 나눠도 충분히 남았다. 두 번째는 육지뿐만 아니라 금강하구로 이어지는 바닷길 교통이 편리했다. 돈은 예부터 사람 붐비는 곳에 몰린다.

마지막으로 함라마을은 풍수지리상 명당이었다. 마을을 품고 있는 함라산은 장삼차림의 스님이 두 팔을 펼치고 있는 형국. 그 아래 마을은 스님이 시주를 받는 주발에 해당한다. 가만히 있어도 부가 쌓인다는 길지다. 부자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함열의 삼부잣집은 베푸는 데도 너그러웠다. 보릿고개나 흉년이 들 때면 전국의 걸인들로 북적였다. 풍각쟁이들도 들끓었다. 판소리 명창 쑥대머리의 임방울(1904∼1961)은 조해영 가옥에 몇 달씩 머물곤 했다. 판소리단가 호남가에 ‘인심은 함열이요, 풍속은 화순’이라는 것도 소리꾼의 입소문 덕택일 것이다. 삼부잣집의 선행은 당시 동아일보에 미담기사로 남아있다.

‘익산 함열면 사는 양심 잇는 부자, 구차한 사람에게 삼천 원을 긔부/걸인으로 성시(成市)한 함열, 밥을 구하는 수백여 명의 동포, 집마다 과객의 답지로 대번창’(1925년 3월 3일자). ‘빈한한 동포 위하야 집중되는 각층의 동정(同情), 백 삼십여 명에 2개월간 배식(配食) 익산 함열 3씨’(1932년 6월 24일자).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