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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줄담배는 성폭력?

입력 | 2012-10-20 03:00:00


많은 여자들이 최악의 이별 통보로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의 ‘포스트잇 이별’을 꼽는다. 관계가 삐걱거려 고민하는 여주인공 캐리 앞에 남자친구 잭 버거가 밤늦게 꽃다발을 들고 와 화해를 청하고 캐리는 그와 하룻밤을 보낸다.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난 캐리가 발견한 것은 침대 옆 빈자리와 노트북컴퓨터에 붙여진 포스트잇 한 장. ‘미안해. 안 되겠어. 나를 미워하진 말아줘.’ 캐리는 이별 자체보다 이별 통보 방식에 분노한다. 확실히 남녀의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한 법이다.

▷지난해 서울대 한 여학생이 남자 친구가 줄담배를 피우며 이별을 통보한 행위가 성폭력이라며 사회대 학생회에 제소했다. “그는 그날 저를 만난 뒤 이별을 통보하기까지 계속 담배를 피웠습니다. 남성성을 부각해 여성의 주체적 권리를 압도한 것입니다. 흡연을 통해 표현하는 깊은 고뇌와 위압감 앞에서 내 감정과 입장이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그 여학생이 줄담배 이별 통보를 성폭력으로 규정한 근거다.

▷최근의 성폭력은 강간 추행 성기노출 등 신체적 폭력뿐 아니라 언어적 정신적 폭력까지 포함되는 추세다. 여기서 성폭력 여부를 규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강제성’이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남자가 줄담배라는 마초적 행위로 여자의 감정을 무시했느냐이다. 줄담배는 초조할 때 많이 태운다. 줄담배를 피우며 이별 통보를 하면 성폭력이고, 사랑 고백을 하면 성폭력이 아닌가. 줄담배 대신 소주를 원샷으로 거푸 마시며 헤어지자고 하면 성폭력이 아닌가. 줄담배를 남자의 전유물로 여기는 사고가 편견은 아닌가. 남자가 연기를 계속 내뿜으며 남성성을 부각할 때 주체적 권리를 가진 여자는 뭘 하고 있었나. 페미니스트를 자부하는 필자로서도 판단이 어렵다.

▷서울대 사회대 학생회장이자 유시민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딸 유모 씨는 ‘이 사안에서 줄담배는 성폭력이 아니다’라며 제소를 반려했다. 이후 해당 여학생과 여성주의 단체들이 유 씨를 ‘성폭력의 2차 가해자’라고 공격하자 학생회장직을 사퇴했다. 남녀 문제를 공론(公論)의 장으로 끌고 나오는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은 필자의 세대와는 다른 것 같다. 일부 여대생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과잉 페미니즘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젊은 남녀에게 헤어짐이 워낙 아팠기 때문일까.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