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삐라로 묻어라/이임하 지음/476쪽·2만5000원·철수와영희
6·25전쟁 때 북측에 뿌려진 삐라(전단) 문구 중 하나다. 그림에는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김일성과 그에게 코뚜레를 끼워 조종하는 스탈린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삐라’라는 말은 영어 단어 ‘bill’의 일본식 발음인 ‘비라’에서 왔다. 이를 된소리로 발음해 삐라로 부른 것이다. 한국방송통신대 통합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전쟁과 여성에 관한 책을 써온 저자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 등을 뒤져 6·25전쟁 때 미국이 심리전을 펼친 대표적 수단이었던 삐라를 조사했다. 그리고 미국의 심리전이 오늘날까지 한국사회에 나타나는 획일성, 세계기구에 대한 맹신 등에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한다.
이 책에는 상당한 수의 삐라 사진이 수록돼 삐라를 구경해본 적 없는 젊은 독자에겐 흥미롭게 다가온다. 삐라는 북한군이 남쪽으로 넘어오면 환영하겠다는 안전보장 증명서이기도 했고, 음식을 주고 치료도 해주겠다며 좋은 대우를 약속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삐라에는 김일성 마오쩌둥 스탈린을 희화화한 삽화가 빈번하게 등장했고, 공산주의자는 뚱뚱하게 그려졌다. 공산주의자가 인민을 위하는 체하지만 결국 탐욕스럽게 인민을 착취하고 있음을 알려 공산주의 신화의 허구를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이 같은 미국의 심리전 속에서 세계는 유엔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세계와 공산주의 세계로 양분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도식은 한국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한국 현대사를 지배해온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했다. ‘적’뿐만 아니라 ‘아군’까지 삐라로 묻어버린 셈이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