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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자학적 역사관, 자학적 경제민주화

입력 | 2012-10-22 03:00:00


김순덕 논설위원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성공 사례로 언급할 때면 손발이 오글거린다. 미국의 진보적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가 5월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영향력을 높인 GUTS(독일 미국 터키 남한) 국가’로 우리를 소개했을 때도 그랬다. 우리가 정말 끈기(guts) 있는 나라인지 어떤 후보 말처럼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진 상태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최근 국내에 나오기 전부터 세계 유수 언론에서 주목받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에도 한국은 포용적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로 성공한 나라로 여러 번 등장했다.

포용적 경제제도란 사유재산권 보장, 공정한 경쟁, 신기술 투자로 요약된다. 우리나라에선 재벌이 개혁 대상으로 몰리는데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두 저자는 ‘삼성과 현대 같은 기술혁신 기업이 북한 아닌 남한에서 배출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항일 공산주의자 김일성’이 아닌 ‘골수 반공주의자 이승만’이 미국의 후원으로 초기 경제 및 정치제도를 정비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물론 대선을 앞둔 나라에서 갈등과 위기론이 없을 수 없다. 우리가 이만큼 발전한 것도 끝없는 불만과 위기의식 덕분인 것도 틀림없다. 하지만 외국에선 우리를 썩 괜찮은 나라로 보고 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시각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선 안 될 나라’로 보는 자학사관(自虐史觀)이 현실 인식과 처방마저 자학적으로 몰고 가는 형국이어서다.

쉬운 말로 ‘양극화 해소’ 찬성한다

나는 다음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양극화 해소라고 생각한다. 우리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고 경제 불평등과 정부 역할을 놓고 들끓지 않는 데가 없다.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자극과 번영을 가져온다던 국제통화기금(IMF)의 주류 경제학자들도 “지나친 격차가 성장을 해치고 기회의 평등을 축소시키며 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고 노선을 수정했다.

우리나라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0.311)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0.314)과 비슷해도, 소득상위 10%의 수입은 최하위층 10%의 평균 9배인 데 비해 우리는 10배다. 미국(14배)보다 낫지만 우리 국민은 언제나 세계 최고와 비교한다. 평등으로 소문난 덴마크 스웨덴(6배)만큼이 아니면 만족하기 힘든 국민인 셈이다.

유능한 정부의 ‘보이는 손’은 그래서 절실하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정부가 해소에 힘써야 한다는 건 서해 북방한계선(NLL)이 위험할 때 정부가 국방에 힘써야 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빈곤층이 스스로 부를 키우도록 직업훈련과 교육 등으로 지원하는 대신 정부를 키워 경제민주화를 하겠다면 양극화 해소 의지가 의심스럽다. 규제권력 확대는 오히려 공조직의 ‘쌈짓돈 확대’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경제민주화가 곧 재벌개혁인 것처럼 해체까지 위협하는 후보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분노하는 건 재벌보다 부패이고, 정관계와 재계의 불륜이다. “정부와 경제가 결탁한 정경유착(cronyism)이 특히 아시아 불평등의 핵심”이라고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도 최근 ‘진짜 진보’ 특집에서 지적했다.

이명박(MB) 정부 내내 부자 내각 측근들은 공공조직의 감투부터 영세민을 대상으로 하는 저축은행의 뇌물, 심지어 공사장 함바집 떡값까지 잘도 받아먹었다. 공직자들 사이에는 ‘세 바퀴’라는 말까지 나돈다. 정부를 떠나고도 관련 기관, 그 다음엔 관련 기업, 그러고도 연관 있는 대학에 낙하산을 타고 가선 그들의 방만을 조장하는 로비스트 역할을 해서다.

시장의 탐욕은 규제돼야 한다. 그러나 법대로 공정거래위원회나 국세청이 과징금을 물려도 행정소송에서 가볍게 처리해 주면 그만이다. 해외 공항 카트에서 삼성 마크만 봐도 고맙고 반가운 때가 있었는데 편법 상속에 일감 몰아주기, 재산 다툼까지 추한 모습을 드러냈고 정부는 사면까지 해줬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 말은 선거자금에다 정책까지 받아 쓴 재벌에 대한 항복 선언이라는 지적도 있다.

경제민주화의 해법으로 더 많은 시장경제가 제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경유착을 끝장내고 양극화 문제를 풀려면 정부가 공공서비스부터 학교교육까지 활짝 개방해 기득권과 부패구조를 깨는 것이 ‘진짜 진보’라는 것이다.

公개혁 빠진 경제민주화는 사기

어떤 당은 ‘재벌개혁 없는 경제민주화는 허구’라고 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공공개혁 없는 경제민주화는 사기(詐欺)라고 해야 옳다. “정부부터 동일노동 동일임금” “(불법) 노조활동으로 해고된 공무원 복직”을 외친 후보들은 공공 비대화가 재정위기를 키운 그리스로 가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대선후보들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부를 키우는 공약인지, 정부를 키우는 공약인지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경제민주화는커녕 부패에 세금까지 키울 공산이 크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