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된 메시지에 따라 도심을 헤매고 골목길서 낙서하다 불쑥 드는 생각은…호주 극단의 장소 특정 공연 ‘거리에서’ ★★★★
한 관객(헤드폰을 착용한 여성)이 남대문시장 입구 계단에 앉아 바삐 오가는 인파를 바라보며 ‘군중 속의 고독’을 음미하고 있다. 한국공연예술센터 제공
서울 명동 프린스호텔 뒤쪽 남산 자락 아래 한 좁은 골목길을 서성일 때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이런 목소리에 당신은 멍해질 수밖에 없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이런 풍경이…’ 하고 신기해하는 당신의 귀에 다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이 글이 난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까 본다는 건 좀 거만한 행위인데, 뭐랄까 오감 중에서는 가장 거만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이 글은 그걸 뒤집고 있으니까. 본다는 행위를 통해 내가 보여진다는 것. 내가 외부에서 무언가를 본다기보다는, 내가 보는 것 속에 내가 있고, 그 내부 또한 나를 보거나, 알고 있다는 것, 대충 그런.”
당신은 30분 전 전날 받은 휴대전화 메시지를 따라 정해진 시간 지하철 4호선 명동역 1번 출구 앞으로 나왔다. 한 여인이 다가와 당신이 ‘거리에서’ 공연 참여자인지를 확인한 뒤 당신에게 문자메시지로 지시를 내려줄 휴대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사전 녹음된 내레이션과 음악이 17개 트랙으로 나뉘어 깔린 MP3 플레이어와 연결된 헤드폰을 착용토록 도와준다. 이제 당신은 문자메시지 또는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녹음된 목소리에 의지해 서울 도심 깊숙이 숨겨진 낯선 장소를 찾아다니는 2시간의 여정을 떠난다.
서울의 낯선 풍경을 새롭게 발견하게 해준 장소 특정 공연 ‘거리에서’에 참여한 관객이 서울 북창동 골목길 벽면에 가득 적힌 ‘평소에 늘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던 말들의 숲’ 사이에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을 적고 있다. 한국공연예술센터 제공
그러다 북창동 허름한 음식점 골목길 한 벽면을 가득 메운 ‘낙서의 숲’에 서있게 된다. 거기서 “평소에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던 말”을 한 귀퉁이에 적어놓고 나서는 길에 앞서 당신의 손을 잡고 뛰던 여인이 도망치는 것을 발견한다. 그를 쫓아 뛰다가 어느새 조선호텔 후원 벤치에 앉아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고독한 남성의 고백에 심취한다.
“정말 잃기 싫었던 연인이 있었나요? 당신이 얼마나 많은 골목을 거치고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사랑을 지나쳤든지 간에. 당신 마음의 현관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사람, 그래서 나가보면… 오래전에 버린 때 묻은 소포가 있을 뿐이죠. 당신의 그리움.”
독특한 형식의 ‘거리에서’는 13∼20일간 회당 10명의 제한된 관객을 대상으로 평일 2회, 주말 3회 공연을 펼쳤지만 입소문을 타고 전회 매진됐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