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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박근혜 후보는 ‘집단의 기억’에 따라야

입력 | 2012-10-24 03:00:00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1975년 4월 8일 대학생이던 나는 캠퍼스 안에 있었다. 늦은 오후 학교 관계자들이 다급한 표정으로 학생들에게 “큰일이 났으니 빨리 밖으로 나가라”고 재촉했다. 영문도 모른 채 학교를 나온 뒤 군 병력을 태운 군용 트럭들이 잇따라 학교 정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박정희 정권이 단일 학교인 고려대를 상대로 해서 휴교령을 내린 것이었다. 유신 시절 이른바 긴급조치 7호였다. 휴교령 이후 학교에는 학생 출입이 금지됐으며 군인들이 머물렀다. 한 달여가 지나고 군인들이 빠져나간 뒤 다시 찾은 학교에는 곳곳에 웃자란 잡초들이 무성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인혁당과 정수장학회의 양면성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역사인식 논란을 불렀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확정 판결은 고려대에 휴교령을 선포한 날 내려졌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은 8명에 대한 집행은 형이 확정된 뒤 18시간 만인 이튿날 오전 4시 55분부터 약 4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정권에 의한 ‘사법 살인’으로 규탄을 받은 집행이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왜 사형 집행을 그토록 서둘렀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사상범이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판결 이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게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1974년 여름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에 이어 대학가의 본격적인 유신 반대 투쟁으로 극도의 위기감에 빠져 있었다. 뭔가에 쫓기듯 이뤄진 사형 집행과 고려대에 대한 ‘표적 휴교령’은 이런 상황과 관련돼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의 씻을 수 없는 과오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1975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2007년 서울중앙지법의 재심 판결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 후보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왔으니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재심 판결의 요지는 이들의 진술이 고문 등 가혹행위를 통해 나온 것이므로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무죄였지만 사형을 집행해 버렸기 때문에 이들의 행위와 관련해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도 진실을 가릴 수 없게 됐다. 이들이 설사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사형 확정과 신속한 집행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는지도 의문이다.

어둡고 침울했던 유신 시절

정수장학회의 사회 환원과 관련된 논란에서도 상당수 사람들은 정수장학회가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이 강제로 빼앗은 재산으로 만든 것이고 박 후보가 아직도 관련돼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19일 SBS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 후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응답이 51.2%로 ‘관련이 없다’는 응답(32%)보다 많았다.

그러나 박 후보가 2005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그만둔 뒤 정수장학회와의 연결 고리는 자신의 측근이었던 현 이사장 최필립 씨,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딴 ‘정수’라는 명칭 정도다. 21일 박 후보가 기자회견에서 밝혔던 대로 장학회 등 공익재단은 다시 개인 재산으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사회에 환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올해 2월 서울중앙지법이 판결한 것처럼 ‘정수장학회에 재산을 내놓은 김지태 씨가 스스로 의사를 결정할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빼앗긴 것으로 보기에는 부족할’ 수도 있다. 또 김지태 씨가 헌납한 재산이 정수장학회 초창기 재산에서 차지했던 비중은 5.8%에 그쳤으며 대부분 각계 성금으로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제의 수탈 기관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직원이었던 김지태 씨의 과거도 반듯했던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박 후보의 설명이나 드러난 사실에 대해서도 불신과 불만의 눈초리를 보낸다. 박 후보의 과거사 인식이 잘못됐다는 의견, 박 후보가 납득할 만한 조치를 빨리 내려야 한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납득할 만한 조치’는 현재로선 이사장을 비롯한 정수장학회 이사진이 물러나는 것 이외에는 별로 없어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특정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명쾌한 평가와 결론을 내리기를 주저한다. 세상의 일이 대개 그렇듯이 역사적 사건에는 단번에 무 자르듯 재단할 수 없는 양면성과 상황 논리가 개입돼 있기 마련이다. 역사는 알면 알수록 판단이 어렵다. 그러나 대중은 다르다. 대중이 아는 역사는 단순명료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과는 별개로 그 시절 정치적으로는 어둡고 침울했다고 사람들은 느끼고 있다. 박 후보의 과거사 인식에 대한 대중의 차가운 시선은 사실 여부를 떠나 이 같은 ‘집단의 기억’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대통령후보로서 박 후보는 이런 눈높이에 맞추고 짐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