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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돼 죄송” 서민들의 기부릴레이… 잿더미 ‘밥차’ 살렸다

입력 | 2012-10-25 03:00:00

■ 화재로 차량-터전 잃은 사랑의 밥차에 온정 쏟아져




‘사랑의 밥차’ 기지가 최근 화재로 소실돼 쪽방촌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식당과 식품업체의 릴레이 ‘음식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24일 한 도시락 업체가 기증한 도시락 500개를 밥차 직원들이 차에 싣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8일 인천 부평역 광장에 온 ‘사랑의 밥차’ 직원들은 평소와 달리 참담한 표정이었다.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줄지어 선 쪽방촌 노인들도 말이 없었다. 식단도 전과 다르게 밥과 된장찌개, 깍두기가 전부였다. 식사를 마친 노인들은 빈 식판을 건네며 조심스럽게 눈인사를 했다. 그때 70대 중반의 할머니가 깨끗이 비운 식판을 들고 직원들에게 다가왔다. 밥차가 올 때마다 남편 손을 잡고 점심을 먹으러 오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며 가슴팍에서 흰 편지봉투를 꺼냈다.

○ 화마에 스러진 밥차

전날 새벽, 황급히 연락을 받고 나온 밥차 직원 채현식 씨는 사고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조여 왔다. 어둠이 짙었지만 연기 기둥은 선명했다. 음식 준비를 위해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머물렀던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밥차 기지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인근 식당에서 시작된 불이 기지까지 덮친 것이었다. 불은 솥이 녹아내릴 정도로 맹렬했고 기지 앞에 세워 놓은 밥차로까지 옮아 붙었다.

채 씨는 그 순간 밥차에 끼니를 의지하는 노인들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차는 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스통이 터지면 다 죽는다!” 어딘가에서 동료의 외침이 들렸다. 차 안에는 조리용으로 쓰이는 20kg 가스통이 3개나 있었다. 채 씨는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 뒤 컨테이너가 불타는 열기로 온몸이 화끈거렸다. 차를 100m가량 옮기고 가스통을 떼어냈다.

일촉즉발의 위기는 넘겼지만 매일 500여 명의 노인에게 제공할 밥을 짓는 밥차 기지는 완전히 불에 탔다. 냉장고와 조리대 창고 등 설비와 기증받은 식재료는 모두 소실됐다. 대장암 말기로 5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50대 여성이 자신의 음식점을 정리하며 기증한 물품도 재가 됐다. 인근 초등학생들이 한 줌씩 봉지에 담아 기부한 쌀과 고추 농사를 짓는 농부가 3년째 보내온 고춧가루도 시커멓게 타 버렸다. “밥차뿐 아니라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의 사랑과 정성이 불에 타버렸다….” 채 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화재로 직원들이 망연자실하는 사이 도둑까지 들었다. 이 도둑은 기지 내부에 있던 식판 숟가락 등 쇠붙이를 모두 훔쳐갔다. 불에 타 운행이 불가능한 밥차를 포함해 피해액이 3억 원에 달했다. 올해 3월 밥차 용지가 경매에 넘어가 쫓겨날 위기에 처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매일 밥차를 기다리는 500여 명의 쪽방촌 노인은 이제 꼼짝없이 굶을 위기에 놓였다.

○ ‘낮은 자’들의 작은 기부

화재 이튿날 밥차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각자 집에 있는 냄비와 밥솥, 그릇을 총동원해 500인분 식사를 겨우 만들어냈다. 알음알음 승합차를 빌려 식사를 운반해온 터였다. 식사를 마친 뒤 흰 봉투를 들고 온 할머니는 바싹 타버린 직원들의 마음을 울렸다.

“많이 힘드시죠. 반찬값에 보태세요.” 봉투 안에는 3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수없이 폈다 접은 흔적이 있는 1만 원권 28장과 1000원권 20장이었다. 그는 “후두암을 앓고 있어 목소리가 잘 안 나오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했다.

“없는 형편에 병원 다니느라 여러모로 힘들었는데 손수 차려주는 점심 한 끼가 큰 위로가 됐어요. 몇 푼씩 짬짬이 모은 돈이라 얼마 안 돼서 죄송해요.” 할머니는 쪽방에서 남편의 병간호를 받으며 투병생활을 하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그날 밥차 사무실에는 독일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42년 전 간호사로 파독된 70대 한국인 여성이었다. 그는 “쪽방촌 노인들을 돕는 일이 힘들어졌다는 기사를 봤는데 한국의 부모님 생각이 났다”며 200유로(약 28만 원)를 송금했다.

이들의 작은 기부는 잿더미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이튿날 인천의 한 추어탕집 주인이 밥차 측에 연락을 해왔다. “추어탕도 기부할 수 있나요?” 그는 추어탕 500인분을 대형 솥에 담아 보내왔다. “장사하면서 힘든 일을 자주 겪다 보니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면 남 일 같지가 않아요. 비록 작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추어탕집 사장은 기자에게 가게 이름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추어탕 기부’ 이후 서울 영등포구의 한 삼계탕집이 삼계탕 500인분을, 중국음식점에선 짜장면 500그릇을 보내왔다. 식당 주인들의 기부 행렬에 식품업체도 동참했다. 신선설농탕은 설렁탕 500인분을, 한솥도시락과 본도시락은 도시락 750개를 제공했다. 현대그린푸드는 사골국 농축액과 냉동 고등어 등 식재료를 기부했다.

서울 가양동의 한 교회는 아예 주방을 내줬다. 기존의 절반 규모라 밥을 두세 번에 나눠서 해야 하지만 조리공간이 없어 막막했던 밥차로선 급식을 이어갈 터전이 생긴 셈이다. 서울 강남구는 식재료를 보관할 창고를 제공했다. 모든 게 잿더미로 변했지만 밥차의 이웃 사랑은 더 넓게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없는 형편에 30만 원을 기부한 ‘암 투병’ 노부부는 24일에도 인천 주안역의 밥차를 찾았다.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부부는 “여기서 식사하는 다른 분들에게 괜한 불편을 줄 것 같다”며 끝내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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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밥차 ::

홀몸노인이나 장애인, 결식아동 등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 무료급식 사업. 사랑의 쌀 나눔 운동본부가 2009년 시작해 인천 부평역과 주안역, 서울역 광장에서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매일(주말 제외) 500여 명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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