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또 짐을 싸들고 돌아왔다. “이혼을 하겠다”니…. 배 속의 아이는 어쩌려고.
남자는 침묵을 지켰다. 신문을 들추며 딸이 아내에게 늘어놓는 하소연에 슬며시 귀를 기울였다.
“그 인간이 문을 안 열어주는 거야. 밖에서 한 시간 넘게 떨었다니까. 얼마나 억울하고 눈물이 나는지….”
신문을 몇 번째인가 복습할 즈음에야 내막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되어 ‘항상 나를 무시했다’ 식의 싸움을 위한 싸움으로 번진 것이었다.
남자는 속으로 한탄을 금치 못했다. 사위나 딸 모두 이기려는 경쟁에만 익숙할 뿐 양보와 조화를 이루는 노력에는 서툰 것이다.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성적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세상을 살아온 세대이니까. 토플 점수의 100분의 1만큼이라도 젊은이들에게 세상살이의 지혜를 요구했더라면 우리 사회의 신혼 풍속도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데 세상도 그렇지만, 걸핏하면 짐 싸들고 오는 딸도 문제였다. 아직도 이 집 소속인줄 아는 딸.
남자는 자괴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닥쳐오는 것을 감지했다. 딸을 잘못 키웠다는, 아울러 언제까지 딸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지, 부부가 죽고 나면 겉만 어른인 딸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지.
곧 태어날 손자를 위해서라도 딸 부부를 독립시켜야 했다.
“미안하다.” 남자는 신문을 놓고 일어나며 말했다. “네? 아빠가 뭘요?” 딸이 물었다.
“우리가 너를 잘못 가르친 모양이구나. 가족은 싸워서 이기는 대상이 아니야.” 남자는 딸이 싸들고 온 가방을 번쩍 들고 나가 현관 밖에 내려놓았다. “네 집으로 돌아가. 이런 일로는 두 번 다시 발걸음 하지 마라.”
남편을 이겨내려 애쓰는 딸에겐 이 집의 엄마 아빠가 자기편이었을 것이다. 편하기도 했을 테고. 하지만 이제 딸은 자기 집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한상복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