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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일본 간 조선통신사들, 묵을 곳 쟁탈전 왜?

입력 | 2012-10-27 03:00:00

◇일본으로 간 조선의 선비들/김경숙 지음/332쪽·1만8000원·이순




‘조선통신사 국서선도선도’ 병풍에 그려진 1711년 조선통신사를 태운 일본 금루선. 이순 제공

조선통신사들이 타고 일본으로 가는 배 안은 하나의 ‘작은 조선’이었다. 17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사신 겸 문화사절단으로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는 때마다 평균 470여 명이 참여해 1년 가까이 타국에 머물렀다. 이 책은 교통이 불편하고 외국과의 교류도 드물던 시절, 수백 명이 함께 경험한 외국 생활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조선통신사의 사행원(使行員)은 다양한 신분으로 구성됐다. 공식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 외에 요리사와 관노, 개인적으로 데려가는 심부름꾼까지 포함됐다. 음악, 미술, 잡기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다양한 직업인들도 동행했다.

지역을 옮길 때는 묵을 곳과 탈것 쟁탈전이 벌어졌다. 사행선 안에서는 각자 배정된 방을 서로 자주 바꿨다. 친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같은 방을 쓰기 위해서였다. 넓고 좋은 숙소를 차지하고픈 바람 때문에 먼저 도착한 사람의 하인들이 방 앞에 붙어 있는 이름 팻말을 바꿔치기하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일본에서 제공한 가마와 말을 놓고도 누가 더 편한 것을 탈 것인지 신경전이 펼쳐졌다. 다툼은 대체로 서얼 출신과 중인 신분의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서로에 대한 적의를 드러냈다. 조선 후기 신분제도의 갈등이 표출됐던 것이다.

이국에서 생일을 맞이한 일행에게는 축하 대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전쟁 재발을 방지하고 포로를 돌려받기 위한 통신사 여정이 고행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일본을 오랑캐의 나라로 멸시했던 조선은 초기에 통신사 파견을 일시적인 정책으로 여겼다. 조선 후기에야 시문이나 그림 등이 활발히 오가며 문화 교류의 비중이 커졌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조선 사신이 쓴 글씨나 그림을 지니면 액운이 달아난다는 믿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송금한 기자 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