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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눈/오코노기 마사오]가해자 한정(限定)과 戰後 화해

입력 | 2012-10-30 03:00:00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가해자 한정(限定)’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전후 화해에 대해 논의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전쟁 피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커진 것은 그리 먼 옛날 일이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 규모가 커졌고, 피해도 심각해졌다. 19세기엔 식민지 쟁탈 전쟁이 빈발했고,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은 총력전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 ‘망각에 따른 화해’가 불가능하게 됐다.

망각이 불가능하다면 책임 추궁이 불가피하다. 책임 추궁 없이는 전후 화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한정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를 위해 전범재판이 필요해진다. 국민 전체를 가해자로 하는 전후 화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인은 능란하게 ‘가해자 한정’을 이뤄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히틀러와 나치에 떠넘겼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유대인 말살 등 나치의 범죄는 상식을 벗어났다. 그 책임을 스스로 철저하게 추궁하지 않는 한 독일인은 유럽 세계에 복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폴란드를 방문했던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는 바르샤바의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종전 40년 기념일에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은 “과거에 눈감는 사람은 현재도 보지 못한다”고 연설했다. 그 ‘잊어서는 안 되는 과거’는 히틀러와 나치의 범죄였다. 이를 신랄하게 추궁한 덕분에 일반 독일인은 전쟁 책임을 면했다.

이상하게도 일본인은 ‘가해자 한정’을 하지 못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많은 전범들이 처형됐고, 중국 정치지도자들이 “나쁜 사람은 소수의 군국주의자들뿐이다”며 ‘구조선’을 내주었는데도 말이다. 연대책임의 집단주의적 문화 때문인지 ‘1억 총 참회’라며 스스로 전쟁 책임을 공유하려고 했다.

그 하나의 일그러진 형태가 A급 전범들의 야스쿠니(靖國)신사 합사(合祀)다. 원래 야스쿠니신사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과 군속, 국민을 봉안하기 위한 종교시설이다. 군사법정에서 심판받은 사람들이 사후에 자신이 신사에 모셔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300만 명 이상의 동포를 희생시키고 아시아 각국에 엄청난 희생과 손해를 안긴 전쟁 지도자들에게는 분명히 일반 국민과 다른 무거운 전쟁 책임이 있다. 하지만 가해자를 한정해 그 책임을 적극적으로 추궁하지 않았다고 해서 일본인이 독일인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오류다. 또 독일과 일본을 그런 틀로 비교하는 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일본의 책임을 추궁할 때 독일과 비교해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보다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 비교해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무력 제압에서 시작된 식민 지배는 징병, 징용 등 전시동원에 이르기까지 전쟁보다 더 큰 피해를 안겼다. 그 책임 또한 전쟁 책임보다 분명히 무겁다.

하지만 전쟁 책임 추궁에 열심인 서구 제국도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식민지 지배를 합법화하고 있다.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빼앗은 홍콩을 난징조약과 베이징(北京)협약에 따라 1997년에서야 중국에 반환했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웃 나라를 병합한 무거운 범죄였다. 이에 가장 근접한 예는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일 것이다. 프랑스도 알제리를 병합해 동화시키려 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그 후 프랑스가 알제리에 사죄와 보상을 해 양국 간 화해가 성립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식민 화해’는 ‘전후 화해’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