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국립극단 ‘블랙 워치’ ★★★★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의 연극 ‘블랙 워치’. ‘이라크전 파병’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병사들의 육성으로 담아냈지만 여기에 내면의 상처를 몸으로 그려내는 신체극과 심각한 상황을 반어적으로 풀어내는 영국식 유머를 함께 접목했다. 국립극장 제공
2006년 창단된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은 창단 공연으로 이 부대를 다룬 작품을 선택했다. 이런 경우면 보통 스코틀랜드의 자부심을 한껏 끌어올릴 만한 작품이 그려질 것이다. 연극의 오프닝 멘트 역시 스코틀랜드의 중심 도시 에든버러에서 열리는 군악 축제 ‘밀리터리 태투’의 소개사를 연상시켰다.
“흥분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곧 저 문이 활짝 열리면서 잊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수많은 백파이프와 드럼이 나타나며 연주가 시작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블랙 워치를 소개합니다.”
그 순간 무대는 당구와 다트게임이 펼쳐지는 펍으로 바뀌고 여자를 기다리며 잔뜩 달아오른 수컷들의 대화가 펼쳐진다. 그리고 이번에 반대편 문이 열리고 등장한 사람은 맙소사, 남자 작가다(연극엔 10명의 배우가 출연하는데 모두 남자다).
연극은 이런 식의 영국 유머로 관객의 기대를 보기 좋게 뒤집으며 이라크 파병 문제란 논쟁적 주제를 실제 파병 병사의 관점에서 풀어 놓는다. 연극은 이를 위해 드라마를 버리고 다큐멘터리를 택했다.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이라크로 갔고 거기서 전우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젊은이들의 육성을 가감 없이 담아 낸 것이다.
대형 마켓 판매원이 되느니 뭔가 명예로운 일을 하겠다며 입대한 그들은 적진에선 박격포, 모국에선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상황에 맞서기 위해 지독한 음담패설과 초등학생 수준의 유치한 장난으로 자신들만의 방어막을 치고 그 속에 웅크린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뒤치다꺼리를 시킨 미군의 엄청난 화력에 압도되고, 그들이 지켜야 할 존재가 약자(이라크 민간인)가 아닌 강자(미군)라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무력감에 빠진다. 그리고 자살 폭탄 테러로 허무하게 전우를 잃은 상실감에 귀향해서도 겉도는 인생이 된다.
올해 토니상 8개 부문을 휩쓴 뮤지컬 ‘원스’의 연출가로 유명해진 존 티파니는 이런 묵직한 내용을 속내를 감추는 영국식 유머와 이를 몸으로 표현하는 춤으로 엮어서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고 풀어낸다. 스코틀랜드 사투리가 섞인 군대 언어를 유창하게 풀어내면서 잘 단련된 신체 언어까지 보여 주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볼 만하다.
“우리 군대가 칭송받는 데는 300년이 걸렸지만 먹칠하는 데는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라는 블랙 워치의 한 장교는 그럼에도 부대를 못 떠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저주받은 거지…. 우리는 피가 달라”라고. 블랙 워치에서 ‘황금실’이라 부르는 그 저주받은 전통에 대해 부하들은 이렇게 화답한다. “우리 스코틀랜드인들은 싸우는 것을 좋아해. 그래서 군대에 들어가지. 하지만 정부를 위해서가 아니야. 영국을 위해서도 아니고. 스코틀랜드를 위해서도 아니야. 우리 연대를 위해 싸우는 거야. 내 전우를 위해서.”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