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밭에서
―이진명 (1955∼ )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리게 된 이즈음
외롭고 슬프고 어두웠다
나는 헌것이 되었구나
찢어지고 더러워졌구나
부끄러움과 초라함의 나날
모래밭에 나와 앉아 모래장난을 했다
손가락으로 모래를 뿌리며 흘러내리게 했다
쓰라림 수그러들지 않았다
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모래 흘리던 손 저절로 가슴에 얹어지고
머리는 모랫바닥에 푹 박히고
비는 것처럼
비는 것처럼
헌것의 구부린 잔등이 되어 기다리었다
모래알들이 말했다
지푸라기가 말했다
영광이 있었다
영광, 영광
새것인 나 아니었더라면
누가 망가지는 일을 맡아 해낼 것인가
망가지는 것이란 언제고 변하고 있는 새것이라는 말
영광, 영광
나는 모래알을 먹었다
나는 지푸라기를 먹었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