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50년 동안 6명의 제임스 본드가 나왔지만 영화 팬들은 주저없이 숀 코너리(1962∼1971)와 로저 무어(1973∼1985)를 꼽는다. 고색창연한 성(城)에서 걸어 나온 듯한 초록 눈빛의 초일류 신사 코너리가 영국 악센트로 “젓지 말고 흔들어서(shaken, not stirred)”라며 마티니를 주문하는 모습에 ‘넋이 나간’ 여성이 부지기수다. 12년간 7편의 영화에서 본드 역을 맡은 무어는 007 상업적 성공의 최대 공신이다.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세계에서 무어는 천하무적 슈퍼히어로였다.
▷남성 관객들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임무를 완수한 본드가 최고의 미녀와 사랑을 나누는 엔딩 장면에 흠뻑 빠졌다. 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바닷가에 나타난 1대 본드걸 우르슬라 안드레스는 단박에 흰색 비키니의 여신으로 등극했다. 본드를 죽이려다 오히려 사랑에 빠지는 역할을 했던 비틀스 멤버 링고 스타의 부인 바버라 바크의 치명적인 매력에 세계가 매혹됐다. 백인만 본드걸이냐는 비판 탓인지 1990년대부터는 흑인 스타 핼리 베리, 중국 스타 양쯔충(楊紫瓊) 등도 등장했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