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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하태원]007 반세기

입력 | 2012-11-03 03:00:00


필자가 극장에서 영화 007 시리즈를 처음 본 것은 1977년작 ‘나를 사랑한 스파이’였다. 러시아 핵잠수함이 사라진 사건을 계기로 펼쳐지는 숨 막히는 첩보전을 다룬 이 영화는 첫 장면인 설원(雪原)에서 펼쳐지는 아찔한 추격전부터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텔렉스 시계, 조립식 제트스키 등 당시로선 깜짝 놀랄 신병기가 많이 등장했다. 압권(壓卷)은 역시 본드카 ‘로터스 에스프리’. 유선형의 최고급 스포츠카가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소형 잠수함으로 변신하는 모습은 경탄 그 자체였다.

▷1962년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50년 동안 6명의 제임스 본드가 나왔지만 영화 팬들은 주저없이 숀 코너리(1962∼1971)와 로저 무어(1973∼1985)를 꼽는다. 고색창연한 성(城)에서 걸어 나온 듯한 초록 눈빛의 초일류 신사 코너리가 영국 악센트로 “젓지 말고 흔들어서(shaken, not stirred)”라며 마티니를 주문하는 모습에 ‘넋이 나간’ 여성이 부지기수다. 12년간 7편의 영화에서 본드 역을 맡은 무어는 007 상업적 성공의 최대 공신이다.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세계에서 무어는 천하무적 슈퍼히어로였다.

▷남성 관객들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임무를 완수한 본드가 최고의 미녀와 사랑을 나누는 엔딩 장면에 흠뻑 빠졌다. 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바닷가에 나타난 1대 본드걸 우르슬라 안드레스는 단박에 흰색 비키니의 여신으로 등극했다. 본드를 죽이려다 오히려 사랑에 빠지는 역할을 했던 비틀스 멤버 링고 스타의 부인 바버라 바크의 치명적인 매력에 세계가 매혹됐다. 백인만 본드걸이냐는 비판 탓인지 1990년대부터는 흑인 스타 핼리 베리, 중국 스타 양쯔충(楊紫瓊) 등도 등장했다.

▷007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 지나친 선악구도에 입각한 시나리오에 식상함을 느낀 관객이 많아졌고 ‘미션 임파서블’ ‘본’ 시리즈류의 한층 박진감 넘치는 첩보액션 영화가 늘어나면서 007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최근 개봉한 50주년 기념작 ‘스카이 폴’은 과거로의 회귀를 택했다. 1편에서 선뵌 독일제 발터 PPK/s 권총이 등장하고 1965년에 나온 전설의 본드카 ‘애스턴 마틴’이 부활했다. 하지만 어쩌랴. 관객들은 이미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넘어 ‘아바타’의 상상력에 더욱 길들여져 있는 것을.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