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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째 신출귀몰 比도피 살인범… 이번엔 경찰이 한발 빨랐다

입력 | 2012-11-05 03:00:00

■ ‘안양 환전소 여직원 살인’ 주범 태국서 검거




2007년 안양 환전소 강도 살인 용의자인 최세용 씨가 범행 전 찍은 증명사진(왼쪽). 오른쪽은 최 씨가 올해 태국에서 도피생활을 할 때 모습. 경찰청 제공

3일 미얀마 접경지역인 태국의 치앙라이 국경관리소. 한 한국 여성이 내민 여권을 보고 태국 이민국 직원은 숨을 죽였다. 여권에 적힌 이름은 시○○(46). 한국 경찰이 주고 간 메모지에서 봤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직원은 태연한 표정으로 출국 허가 도장을 찍어줬다. 버스로 미얀마에 넘어간 시 씨는 예상대로 몇 시간 뒤 다시 이민국 심사대에 왔다. 체류 기간 연장을 위해 외국인들이 주로 쓰는 수법이다.

국경관리소를 나간 그에게 이민국 직원 5명이 따라붙었다. 태국 주재 한국 경찰관이 “여자가 나타나면 잡지 말고 몰래 추적해 달라”고 당부한 터였다. 2명은 시 씨가 탄 버스에 동승했고 3명은 승용차로 뒤따랐다. 버스에서 내린 그는 치앙라이 외곽의 한 커피숍에 들어갔다. 모자를 쓴 채 귀퉁이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향했다.

5년 전인 2007년 7월, 경기 안양시 비산동의 환전소에서 20대 여직원 A 씨는 최세용 씨(46) 일당에게 ‘신고하지 않을 테니 살려만 달라’고 빌었다. 현금 1억 원을 빼앗아 환전소를 나서는 순간 최 씨는 여직원이 몰래 긴급 신고 버튼을 누르는 장면을 봤다. 발길을 돌린 최 씨는 여직원을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했다.

경찰이 범인 신원을 확인했을 때 최 씨 일당은 이미 필리핀으로 도주한 뒤였다. 수천 개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에서 숨은 범인을 잡기란 쉽지 않다. 사건 이듬해인 2008년 필리핀에서는 한국인 관광객을 납치하는 사건이 잇따랐다. 필리핀 여행을 앞둔 한국인들에게 인터넷을 통해 “여행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접근한 뒤 납치해 돈을 뜯어내는 수법이었다. 한국에서 여러 차례 강도짓을 저지른 최 씨는 필리핀으로 도주한 뒤에도 범행을 멈추지 않았다.

피해자 윤모 씨는 그해 여름 마닐라 공항에서 최 씨 일당을 만났다. 그들은 “한국 분을 만나니 기쁘다. 형 동생 하자”며 환대했다. 하지만 공항 앞에 세워진 승합차에 함께 타자마자 총과 칼을 꺼냈다. 윤 씨는 4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주택 지하로 끌려가 폭행당할 때 이들이 총을 두 발 쐈고 한 발은 어깨를 스쳤다”며 “빨랫줄로 온몸이 묶인 채 맞았고 머리에서 피가 쏟아져 눈을 뜰 수 없었다”고 말했다. 최 씨 일당은 윤 씨 지갑에서 그의 초등학생 아들 사진을 꺼내 보며 “1000만 원을 당장 보내지 않으면 너도 죽이고 네 아들도 불러서 죽일 테니 가족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최 씨 일당은 이런 수법으로 이후 4년간 13명에게 2억7000만 원을 뜯어냈다. 지난해 9월 납치된 홍모 씨 등 피해자 중 2명은 아직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이들이 피랍 과정에서 최 씨 일당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은 어렵게 공범 2명을 잡았지만 최 씨의 행방은 묘연했다. 5월 국내에 송환된 공범 김모 씨(40)는 “최 씨는 신출귀몰하는 양반이다. 능력껏 잡아보라”며 조롱했다. 지난달 필리핀에서 잡힌 또 다른 공범은 현지 유치장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경찰은 최 씨의 아내를 주목했다. 그가 바로 시 씨다. 시 씨는 올해 1월 한국에 들어와 최 씨 동생 명의로 여권을 만든 뒤 5월 태국으로 떠났다. 며칠 뒤 최 씨 동생 여권을 소지한 사람이 태국에 들어온 사실도 확인됐다. 최 씨가 동생 여권으로 신분을 속이고 태국에 숨어 지낸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비자 없이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인 점을 감안해 경찰은 8월 최 씨가 머무는 태국 치앙라이 국경관리소에 형사들을 급파했다. 장기체류를 할 수 있는 비자가 없는 시 씨가 남편과 계속 지내려면 3개월마다 체류 기한을 연장하기 위해 국경관리소를 찾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첫 시도는 시 씨가 우리 경찰이 도착하기 하루 전 체류 기간을 연장해 버려 실패했다.

다시 3개월 뒤인 이달 3일, 우리 경찰은 방콕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태국 이민국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시 씨가 탄 버스를 쫓고 있다”는 전화였다. 이민국 직원들이 이날 시 씨를 따라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시 씨와 마주앉은 남자는 사진과 달리 뿔테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기른 얼굴이었다. 직원들이 그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최세용 맞지?” “저는 최○○인데요.” 최 씨는 동생 이름을 대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때 커피숍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민국 직원에게 우리 경찰의 전화가 걸려왔다. “들키면 분명히 동생 이름을 댈 겁니다. 무조건 잡으세요.” 최 씨의 도피 행각은 5년 4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태국 경찰은 최 씨를 여권 위조 혐의로 조사한 뒤 한국으로 추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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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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