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삼국유사 시리즈 ‘멸’ ★★★★
국립극단의 신작 ‘멸’에서 경순왕 김부 역으로 출연한 정보석은 ‘한국적인 리처드 3세’라 할 만큼 마성을 지닌 캐릭터를 창출해냈다. 역사 속 경순왕은 그저 무력하고 불행한 왕이지만 연극 속 김부는 다 쓰러져가는 나라의 왕좌를 위해 적국 왕의 애완견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고, 그 권력 유지를 위해 맏아들의 죄의식과 둘째 아들의 권력욕까지 갖고 노는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국립극단 제공
김부대왕은 신라 천년사직 최후의 왕 경순왕을 말한다. 김부는 후백제 견훤의 기습공격에 허를 찔려 포석정에서 놀다가 비명횡사한 경애왕의 사촌동생으로,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가 8년 만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장본인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다른 신라왕의 경우 하나같이 시호를 썼지만 유독 경순왕만은 그 이름을 따 김부대왕으로 불렀다. 사가들은 이를 놓고 김부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에둘러 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놨다. 앞선 3대의 왕이 모두 박씨였는데 갑자기 김씨가 왕이 됐다. 게다가 마의태자로 유명한 그의 맏아들 김일(金鎰)은 고려에 항복하려는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복종을 거부하지 않았는가.
‘자객열전’을 연출한 박상현은 이 역사극을 현대물처럼 둔갑시켰다. 분명 통일신라시대를 그린 사극인데 그리스 신화 속 승리의 여신 니케의 목이 잘린 동상과 새장만이 무대 한쪽을 지키고 사방이 계단으로 둘러싸인 무대는 텅 비어 있다. 암전 때 작은 소품이 잠시 등장했다 사라질 뿐 나머지는 배우들의 힘만으로 끌고나간다.
첫 장면은 젊은 남녀가 뒤섞인 난교의 현장. 최소한의 의상만 걸친 앙상블 배우들이 신라 토우를 모사한 듯한 동작으로 왕실사찰 포석사(삼국유사엔 포석정으로 기록돼 있다)에서 펼쳐진 비밀스러운 파티의 현장을 그려낸다. 다음 순간 커다란 총성과 함께 무대 오른쪽 벽이 통째로 열리면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단의 테러리스트들이 난입한다.
트렌치코트 자락 휘날리며 총격을 가하는 그들의 두목 이름은 견훤(신덕호). 그렇다. 신국(神國)이라 불렸던 천년왕국에 전대미문의 치욕을 가한 후백제의 서라벌 기습공격의 장면이다. 아뿔싸. 그런데 그 흉악한 무리 중에 김부(정보석)가 섞여 있다.
그는 ‘배트맨’의 악당 조커에 필적할 ‘썩소’를 날리며 자신의 사촌형인 경애왕을 직접 쏴죽이고선 왕비가 눈앞에서 겁탈당한 치욕을 참지 못해 자결했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또 경애왕의 동생 효렴세제를 후백제군의 인질로 딸려 보내는 방식으로 왕위계승의 경쟁자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라 사촌형을 애도하는 ‘악어의 눈물’을 흘린다.
그런 김부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다. 맏아들 김일이다. 어린 김일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장면을 들킨 김부는 그 아들에게만 관대하다. 그리하여 ‘서라벌의 양심’으로 자라난 김일은 점차 아비가 지옥에 갈 때까지 묻어 두려는 비밀에 조금씩 다가선다.
그리하여 ‘비밀=권력’을 지키려는 아비와 ‘진실=혁명’을 꿈꾸는 아들의 대결구조는 시공간을 초월한 비극으로 아로새겨진다. 아비와 정략결혼을 앞두고 아들을 짝사랑하게 된 왕건의 딸 낙랑공주(최지영)는 그리스 비극 ‘페드라’를 떠오르게 하고 견훤과 신검(유승락) 부자의 이야기는 김부·김일 부자관계를 뒤집는 ‘거울효과’를 발생시킨다.
우리의 김부는 천년왕국을 내줄지언정 ‘욕망의 챔피언’ 벨트는 결코 놓지 않으려 한다. 과연 욕망은 불멸할 것인가 필멸할 것인가. 마지막 순간 김부는 소름 끼치는 승자의 웃음을 남길 것인가 아니면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흘릴 것인가. 하회(下回)는 무대에서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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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까지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 2만∼3만 원. 1688-5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