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점심에 식당밥을 사먹는다. 밥알에 풀기라곤 하나도 없다. 푸석푸석하다. 하나같이 스테인리스 밥그릇이다. 밥뚜껑을 열면 식은땀이 주르르 흐른다. 언제 지은 밥일까. 보온밥솥의 마른 ‘쇠 냄새’가 역하다.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황지우 ‘거룩한 식사’에서)
밥은 이미 천덕꾸러기다. 반찬이 주인이다. 한마디로 ‘밥맛이 영 밥∼맛’이다. 안남미 밥이 이랬을까. 영락없는 옛날 통일벼 쌀밥이다. 도무지 찰기가 없다. 밥알이 입안에서 질척인다. 자꾸만 잇바디에 젖은 낙엽처럼 달라붙는다.
우리 쌀은 깨지거나 흠간 게 적지 않다. 그 비율이 최대 10∼15%에 이른다. 외국 쌀 1∼3%에 한참 못 미친다. 단백질 함량도 많아 씹는 맛이 그저 그렇다. 이삭거름을 많이 준 탓이다. 게다가 식당에선 거의 묵은쌀을 쓴다.
일본 식당밥은 맛있다. 도시마다 즉석도정전문점이 곳곳에 있다. 최대한 ‘갓 도정한 쌀’로 손님 들이닥칠 시간에 맞춰 밥을 짓는 것이다.
밥맛은 햅쌀일수록 구수하고 차지다. 그때그때 지어 먹던 어머니의 ‘집밥, 솥밥’이 바로 그렇다. 밥알 하나하나가 입안에서 살아서 뛰논다. 잇몸과 이빨 사이를 탱글탱글 넘나든다. “치이∼ 치익!” 무쇠 솥의 구수한 밥물 냄새가 가슴을 달뜨게 한다.
언젠가부터 ‘집밥’이 사라지고 있다. 식당밥이나 비슷해졌다. 때맞춰 밥 짓는 가정은 갈수록 찾아보기 힘들다. 하기야 전기밥솥 ‘쿠!쿠!’가 알아서 해주는데 무슨 걱정이랴!
지극한 맛은 원래 맛이 없다(지미무미·至味無味). 담담하다. 밥맛이 그렇다.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조선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죽어서도 밥이 있는 제사상을 받는다. 밥은 한식의 처음이요 끝이다. 기본이다. 밥은 생명이다. 하늘이다.
추운 겨울밤, 아랫목 사각 꽃보자기에 덮인 아버지의 밥그릇을 떠올린다. 하얀 사기그릇이 미어질 듯한 고봉밥. 다문다문 풋콩이 박힌 눈부신 햅쌀밥, 뚜껑을 열면 김이 무럭무럭 기름 자르르 하던 밥. “햐아! 잘 먹었다!” 아버지는 걸쭉하게 트림을 하며 소 웃음을 웃곤 했다.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마른 나무 목단, 작약이 핍니다/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엄재국 ‘꽃밥’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