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효주 기자의 춘천 국야농원 조향사 체험
11월의 국화에서는 어떤 향기가 날까. 7일 강원 춘천시 국야농원에서 본보 손효주 기자(왼쪽)가 조향사 체험을 하는 모습. 조향사들은 가장 좋은 향이 나는 국화를 골라내 향을 포집한다. 오른쪽부터 조향사 체험을 도와준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 항료연구팀 최지영, 고승호 선임연구원. 춘천=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7일 강원 춘천시 외곽의 국야(菊野)농원. 야생국화를 육종하고 재배하는 이 농원 비닐하우스에서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 향료연구팀 최지영 선임연구원(조향사·調香師)이 국화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처음의 꽃과 2c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똑같은 모양의 꽃이었다. 구린내를 예상하고 코를 갖다댔다. 그 순간 수수하고 아련한 향이 콧속으로 안착했다. 그 향은 머릿속 수많은 향기의 색인 중 하나를 골라낸 뒤 추억을 펼쳐놓았다. 어린 시절의 어느 가을날, 젊었던 부모님과 산길을 걸을 때 바람에 실려 왔던, 가을이 가득 담긴 향이었다. 최 연구원은 “핀 지 하루 정도밖에 안 됐을 것”이라며 “꽃은 피기 시작하는 순간 봉오리 안에 숨겨 놓았던 향기를 폭발시키듯 가장 좋은 향기를 낸다”고 했다.
최 연구원과 고승호 선임연구원이 크기와 색깔이 다양한 10여 종의 국화 향을 일일이 맡고 다녔다. 그러더니 벌들이 한참 동안 붙어있던 노란 국화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고 연구원은 “벌이 떠날 줄 모르는 꽃은 그만큼 향이 강하고 좋다”고 했다. 그는 벌이 떠나자 콧속에 국화를 넣기라도 할 듯이 냄새를 맡고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국화 옆에 지지대를 설치하고 노란 꽃 세 송이에 주먹만 한 크기의, 헬멧을 닮은 투명한 기구를 씌웠다. 겨울을 코앞에 둔 늦가을, 올해 마지막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국화에서 향을 포집(捕執)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향기, 기억의 색인을 펼치다
두 조향사는 ‘꽃 헬멧’의 빈틈을 밀봉했다. 그러고는 헬멧에 난 작은 구멍에 다공성 고분자 화합물(폴리머) 막대를 꽂았다. 막대 뒤에는 길고 얇은 호스가 연결됐다. 호스의 끝과 연결된 작은 펌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펌프가 공기를 빨아들이면 헬멧 안에 있는 국화 향이 폴리머 막대에 다닥다닥 달라붙는다.
조향사들은 포집한 향을 실험실에 가져간 다음 그 성분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성분 분석이 끝나면 각각의 성분이 든 물질을 혼합해 자연 속의 향을 재조합한다. 합성향료를 만드는 것이다. 최 연구원은 “천연향을 그대로 쓰면 가장 좋겠지만, 천연향료는 꽃 1t당 1∼100g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천연향료를 쓰게 되면 항료가 들어가는 향수나 화장품, 샴푸 등의 생활용품 가격이 치솟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좋은 상태의 천연향을 견본 삼아 합성향료를 만들면 자연의 향기가 고스란히 밴 제품을, 비교적 싼 가격에 소비자에게 공급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꽃을 이용하는 포집법은 다른 방법(꽃을 수증기에 찌거나 휘발성 용제에 담가 향을 추출)에 비해 최대한 본연 그대로의 꽃향기를 뽑아낼 수 있다. 그래도 사람들이 실제 후각을 통해 느끼는 향과는 미세한 차이가 난다.
고 연구원은 어느 여름날 아침 충남 부여 궁남지 위 다리를 걸으며 맡았던, 바람에 실려 오는 은은한 연꽃 향에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추출한 향은 그때 그 냄새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았다. “제가 처음 맡았던 연꽃 향기에는 그 몽환적이던 연못의 향과 바람, 신선한 여름 아침의 공기가 결합돼 있었어요. 꽃을 그대로 갈아 넣었다고 해도 될 만한 천연향료에서 기억 속의 향기를 맡을 수 없는 건, 그때 그 상황을 구성하던 바람과 공기의 성분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비싼 천연향료를 두고 ‘향기가 너무 낯설다’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조향사들은 그때, 그 장소를 거닐며 맡았던 냄새를 모두 세세하게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계가 분석한 성분에다 사람이 후각으로 느낀 요소를 가감하는 향 조율 과정을 거쳐야 마침내 “이게 바로 그때 그 향기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합성항료가 탄생한다.
가장 향기로운 국화를 찾아서
꽃 위에 씌워 향을 모으는 기구. 호스를 연결한 펌프가 공기를 빨아들이면 헬멧 모양 유리관의 오른쪽에 달린 하얀 특수 막대에 국화 향이 달라붙는다. 춘천=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그래서 조향사들은 그해 조향 대상이 될 꽃이 필 시기가 되면 초조해진다. 어느 순간에 꽃이 필지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시기엔 술을 마실 수도, 향기가 조금이라도 나는 화장품을 쓸 수도 없다. 다른 향기의 간섭을 받으면 후각이 둔감해져 방금 핀 꽃 중 가장 향기로운 꽃을 골라내기 어려워진다. 향기를 만들어내는 조향사들이지만 정작 그들은 향수를 쓰지 않는다. 후각을 최대한 백지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다. 꽃이 제 봉오리를 활짝 펼치며 내는, 가장 향기로운 향을 둔감해진 후각 탓에 놓쳐버리는 것만큼 조향사들에게 안타까운 일은 없다.
어떤 꽃이 개화하는 순간은 말 그대로 찰나이고, 꽃이 핀 채로 있는 시간 역시 짧아 조향사들은 더욱 긴장한다. 연꽃은 여름철 피었다 오그라들길 4, 5일 정도 반복한 뒤 져 버린다. 옥잠화는 밤에 피었다가 몇 시간 안에 진다. 조향사들은 그 짧은 순간 안에 가장 ‘깨끗한’ 코를 동원해 최상의 향기를 내는 꽃을 골라내야 한다.
조향사들은 국화 향이 다 포집되길 기다리는 2시간여 동안 농원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름 모를 풀이 보이면 거리낌 없이 먹어보고, 향을 맡아보면서 후각과 미각으로 향기 성분을 분석해 냈다. “처음 보는 식물은 무조건 먹어보고 냄새도 맡아봐야 돼요. 언제 어디에 아직 개발되지 않았지만, 우리 기억 속 어딘가에 각인돼 있는 소중한 향기가 있을지 모르거든요.” 향기의 덩어리라는 얽히고설킨 실타래에서 향 성분의 실마리를 찾고 그것을 하나하나 정성껏 풀어 해석해 내는 조향사. 그들의 눈빛에서 누군가의 기억에 들어있는 향기의 색인을 펼쳐내 기쁨을 주려는 아이 같은 순수함이 보였다. 기자도 늦가을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국야농원의 국화 향을 맡으며 나름대로 향기를 풀어내 보려 애썼다. 그리고 언어의 빈곤함을 탓하며 그저 “정말 향긋하다”라고만 중얼거렸다.
춘천=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