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 제임스 본드.” 스카이폴(2012년)
하지만 국정원 직원들에 대해 “그들도 알고 보면 평범한 생활인이자 직장인”이라고 말하는 건 다소 망설여진다. 대화 중에 간간이 ‘아, 이 사람은 나와 다르구나’라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 조직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정도가 더하다. “그 회사 요즘 분위기 어때요?”하고 물으면 잘나가는 회사는 잘나가는 대로, 못 나가는 회사는 못 나가는 대로 솔직히 답하는 게 샐러리맨의 예의(?)이건만, 그네들은 “우리도 잘 몰라”라고 한다. “옆자리 사람이 하는 일도 잘 몰라”라는 말에 “자리마다 파티션이 있나 보죠?”라고 물어도 답을 흐린다. 내부 구조에 대해 힌트를 줄 수 있다고 여기는 걸까?
그러니 작전 수행 중에 적에게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까먹지 말라며 자기 본명을 두 번이나 말해주는 영국 MI6 비밀요원 007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뻥’이다.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이 혹시 M이나 Q처럼 대를 이어가며 쓰는 일종의 별명이라면 50년이 되도록 왜 제임스 본드가 늙지 않는지, 왜 배우가 바뀌는지도 설명이 됐을 텐데.
코드네임이 아니라 자연인이라 치면, 제임스 본드는 기실 취향이 그리 한결같은 사내는 아니다. 우선 1편인 ‘살인번호’ (1962년) 때부터 일관되게 유지해오는 버릇이 많지 않다. 007의 술은 보드카 마티니라고 알고 있지만 그와 제조법이 다소 다른 베스퍼 마티니도 즐기고, 간접광고(PPL) 때문에 하이네켄도 마신다. 007의 자동차라면 애스턴 마틴을 떠올리지만 후원사에 따라 벤틀리나 BMW도 탔다. 여성 취향은 종잡을 수가 없다.
한 여자만을 상대로 점잖게 데이트하며 별 스킨십도 없는 ‘리빙 데이라이트’(1987년)에서는 호색한이라 부르기도 어렵다. 자주 MI6에서 쫓겨난지라 직업이 첩보원이 아닌 때도 많았다. 유들유들하고 뺀질대는가 하면 과묵하고 무뚝뚝하기도 했고, 때론 냉정했고 때론 다혈질이었다.
1편부터 23편까지 그를 관통하는 일관성이 있다면 ‘다른 수컷을 죽인다’는 점과 ‘자신을 숨기지 않고 본명을 똑바로 말한다’는 점이다. ‘카지노 로얄’(2006년)은 본드의 성격도 바꾸고 M의 성별도 바꿨지만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대사만큼은 영화 마지막에 역대 시리즈 통틀어 가장 멋있게 처리한다.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는 첩보원에 대한 묘사로서는 부정확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시대 남성의 판타지가 투영된 존재로서는 가장 정확한 스케치다. 그를 통해 본 남성의 가장 큰 욕망은 50년째 ‘적진에서 내 이름을 똑바로 말한다’는 것이다. 로저 무어도 말했다. 007은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대사만 할 줄 알면 된다고.
자기 이름을 밝히는 것은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오만일 수도, ‘내가 책임진다’라는 선언일 수도,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겠어’라는 결의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든 그건 세상에 맞서는 작은 선전포고다. 제 이름을 거는 순간 물러날 곳은 사라진다.
그런 당당한 개인에게는 시대착오도 매력의 일부가 된다.
tesomiom 강명, 장강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