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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종말을 앞둔 극한의 상황… 선악의 기준도 바뀌는가

입력 | 2012-11-10 03:00:00

◇패러독스 13/히가시노 게이고 지음·이혁재 옮김/586쪽·1만5800원·재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풍이 거세다. 올해 국내 소개된 ‘신참자’ ‘매스커레이드 호텔’이 줄줄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고, 대표작 ‘용의자 X의 헌신’도 동명의 국내 영화가 개봉하며 베스트셀러에 재진입했다. 후끈 달아오른 열기에 이번 신간이 휘발유를 끼얹을 수 있을까. 히가시노가 쓴 최초의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소개만으로도, 그의 팬이라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될 듯하다.

히가시노의 작품에 익숙한 독자라면 쉽게 새로운 점을 느낄 수 있다. 평범하고 세세한 일상들을 기술하다가 그것들을 연결시켜 반전과 결론을 이끌어내는 ‘미괄식’을 선호하는 그가 이번에는 초반부터 강력한 ‘미끼’를 던져준 뒤 내림차순으로 사건을 정리한다. 오밀조밀, 단단하게 얽힌 구성력에 탄복했던 독자라면 싱거울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처음 던진 화두부터가 강력하기에 좀처럼 책장을 덮기는 힘들다. 이른바 ‘잃어버린 13초’의 미스터리다.

각국의 과학자들이 위기의 징후를 발견한다. 블랙홀의 영향으로 거대한 에너지파가 지구를 덮친다는 것. 이 ‘P-13’ 현상은 3월 13일 13시 13분 13초부터 13초간 이어지는데, 문제는 이로 인해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각국 수뇌부는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비밀로 하지만 결국 운명의 시각이 다가온다.

시점은 다른 인물들로 옮겨간다. 범인 체포에 나선 경찰 후유키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다. 잠시 동안 세상은 변했다. 인간은 물론이고 개와 고양이를 비롯한 동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텅 빈 도쿄에서 후유키는 천신만고 끝에 몇몇 생존자를 발견하고, 이들과 함께 생존을 위해, 사건의 비밀을 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총리 관저로 향한다.

치명적 바이러스의 창궐, 좀비나 외계인의 공격으로 인류의 지속이 위협받은 뒤 남겨진 소수 인간들이 펼치는 눈물겨운 생존기는 익숙한 소재다. 이런 내용이 재생산되는 것은 극한 상황에서의 갈등과 사랑이 손쉽게 드러나기 때문.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남을 살리려면 내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 놓인 생존자들을 그리며 ‘절대적인 선은 존재하는가’ ‘집단과 개인의 가치가 충돌하면 어떤 것을 우선시해야 하나’ 등의 가볍지 않은 문제들을 던진다.

또한 ‘생존자 중에 왜 별 역할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가 끼어야만 했나’라는 의문이 풀리는 지점에 다다르면 이 작가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치밀한지를 깨닫고 탄복하게 된다. 단, 거대한 서사에 밀려 작가의 강점인 세밀하고 아기자기한 드라마가 부족한 점이 아쉽다.

소재와 구성에 있어 작가에게는 새로운 도전인 작품이다. 기발함과 재미, 감동을 뭉뚱그려 평가한다면 공상과학소설의 평균치를 훌쩍 넘는다. 하지만 히가시노란 이름의 기대치를 감안하면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