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굴로 쫓겨난 ‘反혁명’ 아들… 떠날땐 주민들이 60리길 배웅본보 고기정 특파원, 시진핑 下放생활했던 산시성 량자허 현지 르포
《 중국은 8일 개막한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18차 당대회)’를 통해 10년 만의 지도부 교체에 들어갔다. 앞으로 10년간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을 이끌어 갈 지도자들이 어떤 인물인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중국 대륙에 떠오르는 새로운 별들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
22세 량자허 촌장 시진핑 시진핑(앞줄 가운데)이 산시 성 량자허 촌에서 7년간 있다가 1975년 베이징으로 돌아가기 직전 마을 주민 및 지인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그는 22세였다. 사진 출처 바이두
○ “디댜오(低調·자세를 낮춤) 유지하라고 했다”
시 부주석은 원래 ‘태자당(혁명원로 자제 그룹) 중의 태자당’이었다. 부친 시중쉰(習仲勳·1913∼2002)은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다. 최고위 간부들의 주거지인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에 살던 그가 량자허까지 오게 된 건 9세 때인 1962년 아버지가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실각한 것이 계기였다. 산간혁명의 근거지인 시베이(西北)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건국 영웅 류즈단의 생애를 다룬 소설이 마오쩌둥(毛澤東)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오보다 류즈단을 더 치켜세우는 듯한 이 소설 때문에 류즈단의 전우이자 초고를 손봤던 시중쉰마저 반(反)혁명분자로 몰렸다. 반혁명분자의 가족이었던 그는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던 1969년 1월 량자허로 하방(下放)됐다.
농촌 밑바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시진핑은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갔다. 이모부에게서 “민중의 바다로 들어가라. 그게 노동개조를 받고 있는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는 비로소 그 바다에 몸을 적셨다. 시 부주석은 량자허로 돌아와 벼룩과 거친 음식, 농촌생활, 노동, 사상 등 ‘5대 관문’을 통과하며 농민들과 친숙해졌다.
그가 살던 10m²(약 3평) 남짓한 토굴의 입구는 지금은 일반 집과 마찬가지로 개조돼 관광지처럼 꾸며져 있다. 앞에 작은 매점도 있다. 매점 주인은 “일반인에게 개방은 안 되지만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다”라고 전했다. 토굴뿐 아니라 마을 주변도 새로 도로 공사를 하는 등 시 부주석의 최고지도자 등극을 앞두고 지방정부에서 적잖게 신경을 쓰는 듯했다.
토굴 취재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던 중 갑자기 경찰차 한 대와 승용차 2대가 다가와 기자를 둘러쌌다. 공안이 끌고 간 곳은 파출소 분소로도 쓰이는 촌민위원회. 시진핑이 21세 때 서기로 근무했던 곳이다. 연행한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고 외신기자가 함부로 취재하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들은 2시간가량 기자를 억류해 취조한 뒤 풀어줬다.
마을 자율경비대원이라고 밝힌 한 40대 남성은 기자에게 “우리도 시 부주석이 더 높은 자리로 가게 돼 정말 기쁘다. 하지만 위에서 ‘디댜오(低調·자세 낮추기)’를 유지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긴장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런 토굴에서 생활 중국 산시 성 량자허 촌에 지금도 남아 있는 토굴의 내부. 시진핑 국가 부주석도 1969년 하방돼 이런 곳에서 7년간 살았다. 오른쪽 사진은 시 부주석이 살았던 토굴의 외부를 깔끔하게 정비한 ‘시진핑 토굴’의 입구. 량자허=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2007년 10월 시 부주석이 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됐을 때 홍콩 다궁(大公)보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디댜오, 핑스(平實·소박하고 수수), 첸허(謙和·겸손하고 온화), 다치(大氣·대범하고 당당)’라는 4단어였다. 이 중 ‘디댜오’와 ‘첸허’는 오늘의 시진핑을 있게 한 핵심 키워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시 부주석은 량자허에 다시 돌아갔을 때 옌안 사투리부터 익혔다. 촌민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다. 이곳의 거친 잡곡에도 익숙해졌으며 양말을 직접 짜서 신었다. 서기로 있을 때는 전용 승용차를 배정받았으나 엔진을 빼내 트랙터를 만들어 농사일에 쓰도록 한 일화도 전해진다. 베이징의 귀족 청년이 어느새 농군으로 변한 것이다. 주민들은 시진핑이 1975년 10월 량자허 생활을 끝내고 상경할 때 60리길을 걸어 배웅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됐다.
그의 이름 석자를 따서 ‘시(習)-윗세대의 장점을 배우는(習) 데 뛰어나고, 진(近)-중앙 지도부와 지방 인민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近) 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핑(平)-평소 간부로서 태도는 소박하고(平) 겸손, 온화하며 대범하고 당당하다’는 말도 있다. 량자허에서 만난 촌민위원회의 한 청년은 “우리 마을 출신이 최고지도자가 됐다고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한 것도 그가 ‘자세 낮추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