敵이 없는 중용의 리더십… 서방엔 ‘대국의 목소리’ 높일듯
15일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이 공산당 총서기에 오르면서 새로운 시대를 연다. 그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거대 중국을 어떻게 운영할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은 9월 21일 시 부주석이 중국 남부 광시좡족자치구 난닝에서 열린 중국-아세안 박람회 개막식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사진 출처 신화통신
○ 천량위 사건 이후 승승장구… ‘대륙의 황제’로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1913∼2002)은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이 건국된 뒤 국무원 부총리로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보좌한 혁명원로다. 시진핑은 권력자들이 모여 사는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근검절약하는 가풍(家風)으로 누나가 신던 붉은색 신발에 검은 물을 들여 다시 신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몸에 익혔다.
1962년 발생한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아버지가 마오쩌둥(毛澤東)의 미움을 사 반혁명 분자로 몰리면서 실각했다. 가족도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당시 9세였던 시진핑은 7년 뒤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산시(陝西) 성 옌안(延安) 황토고원에 있는 량자허(梁家河) 촌으로 하방(下放)돼 7년간 밑바닥 생활을 체험했다. 시진핑은 이곳에서 10번 퇴짜를 맞은 끝에 공산당원이 됐다. 시진핑은 농촌 현실을 체득하고 인내와 조화 겸손을 배웠던 이곳에서의 경험이 ‘정치 인생의 뿌리’가 됐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이후 그는 푸젠(福建) 성에서 17년간 근무하면서 성장까지 올랐고 저장(浙江) 성 서기로 근무했다. 상하이(上海) 시 서기였던 천량위(陳良宇)가 비리로 실각하면서 상하이 시 서기를 맡았다가 7개월 만인 2007년 10월 제17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에 발탁됐다. 중앙위원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을 거치지 않고 상무위원으로 2단계나 수직 상승한 것. 그가 ‘형님’으로 모시는 쩡칭훙(曾慶紅) 당시 국가부주석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쩡 전 부주석은 “후진타오(胡錦濤)의 공청단 직계인 리커창(李克强)보다 뒤졌던 시진핑이 그를 추월해 황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원로나 각 계파에서 두루 받아들일 수 있는 원만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후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과 2009년 건국 60주년 기념행사 등을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2007년 10월 함께 상무위원이 된 리커창 부총리와의 경쟁에서 끝내 우위를 지켰다.
○ “안으로는 조화, 밖으로는 대국(大國)의 목소리”
후 주석은 8일 공작보고(업무보고)에서 “당과 나라가 망한다”면서 부패척결을 주장했다. 모두 차기 시 부주석의 어깨로 떨어진 과제다. 시 부주석이 어떤 색깔을 드러낼까. 많은 전문가들은 “당분간 기존 정책이 유지될 것이며 몇 년 지나야 시 부주석만의 색깔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시 부주석은 서방에 대해서는 “배부르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우리 일에 이러쿵저러쿵 한다”(2009년)며 민족주의적 시각을 거칠게 노출한 적이 있다. 이를 근거로 그가 ‘패기’와 ‘기개’가 있으며 그의 대외 정책 속에서 ‘중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해질 것’이라고 보는 분석도 있다.
○ 남북한 모두 잘 알아
시 부주석은 2010년 중국군의 6·25전쟁 참전에 대해 “정의로운 전쟁” “중국-북한의 피로 맺어진 우정”이라고 표현했다. 북한의 3대 세습에 시 부주석이 지지를 나타냈다는 얘기도 있다. 시 부주석은 2008년 3월 부주석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지로 평양을 택했다.
하지만 시 부주석은 올해 8월 31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해 양국 우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중국의 현재 과제를 극복하는 데 한국에서 배울 것이 많다는 시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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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