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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 Up]제약사들이 앓고 있다

입력 | 2012-11-14 03:00:00

약값 일괄 인하에 휘청… 다국적기업 공습에 흔들…




“형, 우리 회사는 신약 안 만들어? 좋은 약 하나만 있어봐. 이렇게 구차하게 약 팔러 다닐 일 없잖아.”

올여름 개봉한 영화 ‘연가시’에서 제약사 영업사원인 주인공이 주말 내내 한 병원장의 가족과 놀이공원에 다녀온 뒤 회사 선배에게 하는 말이다.

그래픽 서정원 기자 yankeey@donga.com

국내 중견 제약사의 4년차 영업사원인 A 씨는 “영화가 약간의 과장은 있지만 최근 들어 영업하기가 훨씬 더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계기는 리베이트 규제 강화와 약가 일괄인하. 리베이트를 주고받은 당사자를 모두 처벌하는 쌍벌제가 도입되는 등 규제가 강화되면서 의사나 약사에게 ‘보상’을 제공하기가 어려워졌는데 4월 의약품 가격이 평균 14% 일괄적으로 인하되면서 실적 압박은 더 심해졌다.

약국과 개인병원 영업을 모두 해봤다는 A 씨는 “병원장 집에 가서 컴퓨터를 수리해주거나 손님을 맞으러 대신 공항에 나가는 일 정도는 기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더 고달픈 것은 납품한 약 가격의 90% 정도만 결제해주는 거래처가 아직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업체 간 실적 경쟁이 치열한데 거래처를 잃을까봐 항의할 수도 없다”고 털어놨다.

회사 측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제약사 임원은 “정말 구조조정이라도 해야 할 판이지만 인력을 줄이면 영업력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게다가 영업사원이 홧김에 과거 리베이트 내용을 고발한다고 나서면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약가 인하, 영업이익에 직격탄

약가 인하 이후 제약사들의 실적은 처참하다. 국내 주요 제약사들의 올해 3분기(7∼9월)까지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아제약(―30.4%) 대웅제약(―54%) 유한양행(―45.9%) 일동제약(―85.6%) 등의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줄었고 LG생명과학은 적자로 전환했다.

업계에서는 국내 제약사들이 잇단 악재에 허우적대는 사이 오리지널 약 파워를 앞세운 다국적 제약사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약가 인하 정책으로 특허기간이 만료된 오리지널 약 가격이 더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국내 제약사들이 판매하던 제네릭(복제약)과 가격이 비슷해졌다. 이에 따라 ‘같은 값이면 오리지널’을 처방하는 사례가 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실제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약가 인하가 시행된 4월부터 6월까지 국내 제약사의 처방 실적은 75%에서 73.7%로 감소한 반면 다국적 제약사는 25%에서 26.3%로 높아졌다.
▼ “이러다 외국제약사가 독식하는 거 아니냐” ▼

지난해부터 다국적 제약사들은 잇달아 한국법인을 세우며 한국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상처치료약 ‘후시딘’의 원개발사인 덴마크계 ‘레오파마’가 국내에 진출했고 일본 1위 제약사인 ‘다케다제약’도 한국법인을 설립했다. 최근에는 스페인 제약사인 ‘라보라토리 신파’가 한국법인을 세웠고, 이탈리아 최대 제약사 ‘메나리니’도 한국 진출을 선언했다. 매출액이 수조 원에서 수십조 원에 이르는 다국적 제약사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제약업계에서는 ‘제약 식민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 다국적 제약사, 복제약 시장까지 침공

그래픽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경쟁력 있는 신약을 보유하지 못한 국내 제약사들은 매출을 거의 복제약에 의존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다국적 제약사들도 국내 복제약 시장에 뛰어들면서 국내 제약사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주요 제약사의 블록버스터급 신약들의 특허 만료 시일이 다가오면서 복제약 시장이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우선 세계 복제약 1위 제약사인 이스라엘계 ‘테바’가 국내 상륙을 준비하고 있다. 당초 테바가 매출 1000억 원 이상의 국내 제약사를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최근 유력한 인수 대상으로 지목됐던 한독약품이 “테바와 합작회사 설립을 위한 예비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 합작회사 설립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테바가 국내에 진출하면 복제약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다.

지난달에는 20여 개국에 진출한 복제약 전문 미국 제약사인 알보젠이 근화제약을 인수했다. 올해 초에는 화이자제약이 복제약 전문 브랜드인 ‘화이자 바이탈스’를 국내에 출범시켰다.

다국적 제약사들도 약가 인하로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왜 이처럼 적극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하려고 할까. 이규황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 부회장은 “한국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은 의료서비스가 세계 최고 수준일 뿐만 아니라 고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나라다. 또 중국 시장 진출에 앞서 한국을 테스트 마켓으로 생각하는 제약사도 많다고 그는 설명했다.

영업 환경 변화도 다른 이유로 꼽힌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예전엔 다국적 제약사가 한국 회사의 영업력을 따라갈 수가 없었지만 리베이트 규제가 심해지면서 최근에는 약의 품질만 좋으면 겨뤄볼 만하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 수출 지향 산업으로의 전환이 살 길

국내 제약사들은 매출을 늘리기 위해 다국적 제약사의 제품을 위탁판매하기도 한다. 유한양행 제일약품 한독약품 등 상위권 제약사들은 올 들어 위탁판매 상품 비중을 더욱 높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 매출에 도움이 되겠지만 다국적 제약사가 판권을 회수하고 직접 영업에 나서면 위탁판매로 매출을 보전하던 회사들이 급격히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각계에서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려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 위기 탈출 방안이라고 말하지만 제약사들은 한숨을 내쉰다. 한 상위권 제약사 관계자는 “R&D 투자 비율은 작년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매출과 영업이익이 줄어들면 투자하는 금액 자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해 상반기(1∼6월) 주요 제약사의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율은 작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해외시장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윤택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제약선진화팀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제약시장 보호장벽이 무너지고 있어 예전처럼 국내시장 영업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며 “수출 지향 산업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국내 제약사들은 살아남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해외 진출을 위해 정부 차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김선호 한국제약협회 홍보실장은 “최상위권 제약사들이 해외에서 임상시험을 하며 해외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임상시험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약사가 모두 부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부 차원의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남윤서 기자 bar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