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백화점이 발표한 자료를 토대로 한 기사의 일부다. 기사에 나오듯 양복지(양복을 지을 옷감)는 1960, 70년대에 고급 선물로 인기가 높았다. 멋을 좀 안다는 남성이라면 단골 맞춤 양복집이 하나쯤 있던 시대였다. 1980년대부터 대형 기성복 브랜드가 쏟아지면서 맞춤 양복은 서서히 쇠퇴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맞춤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럭셔리 남성복 브랜드들의 맞춤 서비스인 ‘MTM(Made to measure)’ 서비스를 찾는 고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맞춤의 부활’은 대형 기성복 브랜드가 제시하는 트렌드를 좇기 바빴던 남성들이 이제는 나에게 맞는 옷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특히 몸에 꼭 맞는 이탈리안 슈트가 선호되면서 남성들은 자신의 신체 사이즈에도 눈을 떴다.
“불편하면 옷 아니다” 단추서 원단까지 디테일의 극치
스테파노 리치의 단추 컬렉션.
1972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탄생한 스테파노 리치는 브랜드에 어울리는 전통과 가치를 가진 도시에만 매장을 낸다. 파리, 몬테카를로, 모스크바, 뉴욕, 베벌리힐스 등에 이어 2008년 서울 강남에 매장이 들어섰다. 150수 이상의 최상급 패브릭만을 사용해 오직 피렌체의 장인들 손에서만 탄생하는 슈트는 견고한 인상을 주지만 입었을 때는 편안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스테파노 리치의 MTM 서비스는 꼼꼼한 신체 측정으로 시작된다. 목 뒤에서 구두 굽까지 총 길이를 재고 여기서 1인치를 뺀 뒤 반으로 나누면 재킷의 길이가 된다. 재킷의 길이가 짧아진 트렌드를 반영한 셈법이다. 팔 길이는 어깨 패드 두께를 감안해 재는데, 소매 끝은 엄지손가락에서 12cm를 뺀 지점이 된다. 예전에 비해 소매가 짧아졌다.
색상과 디자인은 클래식하지만 디테일만큼은 어떤 브랜드보다도 화려하다. 색색의 단추는 물론이고 보석이 박힌 커프스링크도 선택할 수 있다. 특히 ‘다이아몬드 칩스’라고 부르는 슈트 원단은 화려함의 극치다.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려 가공한 이 원단은 빛을 받으면 여성들이 펄 화장품을 바른 것처럼 반짝인다. 이 원단으로 제작한 슈트는 3000만 원대다.
숙련된 장인이 한땀 한땀 손으로 만드는 MTM 슈트는 전통과 기술력, 시간의 산물이다. 개인의 취향과 신체 사이즈를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기성복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MTM이 확실한 대안 중 하나라는 데 토를 다는 사람은 없다. 신원건기자 laputa@donga.com
[Kiton] 키톤은 나폴리 전통 스타일을 추구하는 고급 슈트의 대명사다. 따뜻한 지중해 항구도시의 정서가 녹아 있기 때문일까. 키톤 슈트는 경쾌하고 패셔너블하다. 키톤 슈트는 직접 입어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옷 안에 심지를 최소화해 다른 슈트보다 훨씬 부드럽고 흐물흐물한 느낌이 든다. 그 덕분에 무게감은 거의 느낄 수 없다. 마치 파자마를 입은 것처럼 가볍다.
‘불편하다면 옷이 아니다’라는 철학을 대변하는 듯한 디테일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어깨다. ‘마니카 카미치아’라 부르는 셔츠 같은 어깨는 나폴리 스타일의 특징이다. 과장된 어깨 패드는 없고 셔츠처럼 자연스럽게 어깨에서 팔로 흘러내린다. 어깨와 팔이 연결되는 부위에는 주름이 잡혀 있다. 자세히 보면 셔링이 잡힌 여성복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자연스럽다. 주름은 어깨에 작은 공간을 만든다. 슈트가 이렇게까지 편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몇 번이나 팔을 움직여 보게 된다.
직선이 아닌 유선형으로 만들어진 가슴포켓은 ‘라 바르카’(보트)라고 부른다. 마치 보트의 바닥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가슴포켓은 곡선일 때 훨씬 가슴에 밀착한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낸다. 키톤의 MTM 서비스는 ‘반맞춤’이다. 매장에 준비된 모델을 입어 보면서 어느 부위를 줄이고 늘려야 할지 결정하고 원하는 패브릭과 단추 등 디테일을 선택하면 된다. 안주머니에 볼펜꽂이를 추가한다든가 소매 단추를 장식이 아닌 실제 채우고 풀 수 있는 ‘리얼버튼’으로 만드는 등의 선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키톤 관계자는 “너무 많은 사항을 고객에게 선택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냐의 ‘수 미주라’ 슈트.
제냐의 원단에는 150수, 180수라는 표현 대신 ‘14milmil14’, ‘15milmil15’ 등의 이름이 붙는다. 14milmil14는 지름이 14μm(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인 양털을 사용한다는 의미다. ‘milmil’은 1000분의 1m를 뜻하는 ‘밀리(milli)미터’의 제곱, 즉 100만분의 1인 μm를 의미한다. 숫자를 앞뒤에 반복해 붙이는 것은 제냐 특유의 표기 방법이다. 양털이 보통 18μm이고 캐시미어가 13μm라는 것을 고려하면 캐시미어 수준으로 부드러우면서 내구성은 캐시미어보다 강하다는 얘기다.
제냐에서 선택할 수 있는 원단은 600여 개에 달한다. 상상할 수 있는 색상과 패턴 대부분이 준비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이 중에서도 원하는 스타일이 없다면 양털 염색부터 패턴까지 원하는 대로 골라 원단부터 맞출 수 있다.
수 미주라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반맞춤이다. 매장에 진열된 3가지 유형의 모델을 입어보고 조정을 해나가는 방식이다. 제작자와 고객 모두 완성될 옷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 볼 수 있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더 낮다는 것이 반맞춤의 장점이다. 소재는 물론이고 포켓이나 버튼의 위치, 팔꿈치에 패치를 댈 것인지 여부, 셔츠 옷깃의 모양 등은 마음껏 선택할 수 있다. 안감에는 이름이나 특별한 날짜를 새길 수도 있다.
MTM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 중에는 원단 조각만 보고는 완성된 옷의 모습을 떠올리기가 어렵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제냐는 이를 위해 ‘버추얼 피팅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별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원하는 패브릭 컬러와 패턴, 슈트 스타일, 셔츠 색을 고르면 완성품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서비스다.
제냐의 수 미주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층은 30대 중반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면바지부터 코트까지 거의 전 품목을 맞출 수 있다. 가격은 원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350만 원에서 700만 원대까지다.
프랑스 수제화 브랜드 벨루티의 날렵하고 우아한 선은 숙련된 장인의 손에서 태어난다. 가죽을 꿰매 만드는 벨루티의 맞춤 구두는 수십 년을 신어도 변하지 않을 만큼 튼튼하다. 벨루티 제공
6개월간 장인의 손길 200번 거치는 귀족구두
[Giorgio Armani] 과장되지 않고 몸을 따라 흐르는 듯한 실루엣. 비슷해 보이는 여러 브랜드의 슈트 중에서 아르마니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다. 몸의 라인을 살려주는 슈트 실루엣이 바로 아르마니 스타일이다.
세계적인 거대 기성복 브랜드인 아르마니가 맞춤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2004년. 조르조 아르마니는 당시 “패션에서는 조상들이 옷을 제작하던 기술이 현대과학 기술보다도 여전히 우월하다”며 “패션 디자인이 본질적으로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고의 소재로 개인이 원하는 옷을 맞춰 제작하는 행위에서 패션 본질을 찾겠다는 선언이었다.
아르마니의 MTM 서비스는 반맞춤으로 진행된다. 고객은 두 가지 스타일의 옷을 입어보고 그중 한 가지를 선택한 뒤 몸에 맞추는 세부 조정 단계에 들어간다. ‘코스트루이타’ 라인은 각이 잡혀 있는 스타일이고 ‘나투랄레’ 라인은 좀 더 편안한 스타일이다. 그런 뒤에는 150여 가지의 패브릭을 보며 원하는 소재를 고른다. 가슴포켓, 안감, 라펠의 스티치, 버튼 위치 등의 디테일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아르마니에는 고를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좁은 라펠은 만들지 않는다. 고객의 취향을 존중하면서도 아르마니 고유의 스타일을 고집하겠다는 장인정신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보수적인 취향의 고객이 많은 아르마니답게 디테일은 타 브랜드보다 절제돼 있다. 단추는 자개와 쇠뿔 등을 이용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럽다. 다른 이탈리안 슈트 브랜드에서는 바지 끝단을 접어 올리는 ‘턴업’이 대세지만 아르마니에서는 여전히 밑단을 스트레이트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아르마니는 1년에 2번(3월, 9월) 이탈리아 수석 테일러가 방한해 옷을 제작해 주는 특별 행사를 진행한다. 이 기간 이외에는 국내 전문가가 맞춤 서비스를 담당한다. 또 바쁜 고객이나 개인적인 공간에서 옷을 맞추고자 하는 고객을 위해 방문 맞춤 서비스도 한다.
모든 옷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다. 주문한 뒤 제품을 받기까지 셔츠는 5∼6주, 슈트는 6∼8주가 걸린다. 가격은 패브릭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400만 원대부터 수천만 원, 1억 원을 넘는 특별한 슈트도 있다. 보통은 500만∼600만 원대 제품을 많이 선택한다.
파티나 기법으로 독특한 색감을 내는 벨루티 구두.
프랑스 구두를 영국이나 이탈리아 구두와 구별 짓는 것은 ‘선’과 ‘색’이다. 벨루티 구두의 날렵한 선은 여성 구두를 연상시킨다. 돌출되지 않고 낮게 깔린 앞코가 하이힐만큼이나 매혹적이다. 벨루티의 컬러는 은은하고 투명하다. 염료로 가죽을 덮어버린 느낌이 아니라 태닝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들어 있다. 장인이 옻칠을 하듯 섬세하게 손으로 염색하는 ‘파티나 기법’으로 만든 벨루티만의 색감이다. 벨루티 구두는 윈저공, 존 F 케네디 대통령, 파블로 피카소, 이브 생로랑 등 수많은 유명인사에게 사랑을 받았다. 벨루티 마니아인 팝 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이 1962년에 맞춘 구두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앤디 로퍼’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벨루티의 MTM 서비스는 100여 년 전부터 지속돼 왔다. 국내에서는 MTM 희망자가 10명 정도 될 때 이탈리아에서 수석장인을 초청한다. 보통 1년에 한 번 정도 장인이 방한한다. 장인은 고객 한 명 한 명과 개별 면담을 하면서 요구사항을 파악하고 고객이 미처 알지 못한 신체조건까지 분석해 구두에 반영한다. 고객은 가죽의 종류와 컬러 등 구두 제작을 위한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벨루티에서는 모든 종류의 가죽으로 구두를 만든다. 파티나 기법으로 아름다운 색감과 광택을 낼 수 있는 ‘베네치아 가죽’이 제일 대표적인 소재이지만 악어나 타조, 코끼리 가죽 등의 이색 소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격은 950만 원부터 시작하며 악어가죽은 3000만 원을 넘는다.
장인이 고객의 발 치수와 요구사항을 기록해 이탈리아로 돌아가면 그때부터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완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5∼6개월. 2010년 이전까지는 1년 이상이 걸렸던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다. MTM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제품을 사는 게 아니라 장인의 시간을 사는 일이기도 하다.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즐겨 신은 존롭 구두.
기성화를 만들고 있지만 클래식이라는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10년 전에 출시했던 모델이 여전히 제작되고 있고 신상품은 1년에 한두 개 정도만 나온다. 150년 가까이 100% 수제만을 고집하는 브랜드다.
국내에서 존롭의 맞춤 구두를 주문할 기회는 1년에 두 번 영국의 수석장인이 방한할 때다. 장인은 고객의 발을 만져보며 발의 특징을 먼저 확인하고 종이에 발을 대고 밑그림을 그린다. 발등과 발목의 높이와 힐의 위치 등을 모두 체크하면 본국으로 돌아가 나무를 깎아 고객의 발과 똑같은 구두 골(라스트)을 만든다. 이어 투명한 비닐이나 가죽으로 샘플 구두를 만들어 본다. 장인은 다시 고객과 만나 샘플 구두를 신겨 보고 문제가 없나 점검한다. 가죽의 종류나 염색 방법, 앞코의 모양과 테슬, 버클 등의 디테일은 물론이고 취향대로 주문할 수 있다. 존롭만의 염색 방법인 ‘뮤지엄 카프’는 손으로 염료를 칠하면서 자연스럽고 독특한 색감을 낸다. 구두 부위에 따라 염료 농도가 조금씩 달라 얼룩덜룩하게 보이는데 오히려 똑같은 농도로 염색한 구두보다 더욱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200여 개의 과정을 거쳐 구두가 완성되는 데에는 6∼8개월이 걸린다. 처음 존롭의 구두를 신었을 때는 조금 타이트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구두를 발에 적응시키는 데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기성화보다 훨씬 편하고 수십 년 동안 신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귀족에게 사랑받아 온 브랜드답게 2000년대 이전에 출시된 모델에는 그 제품을 처음 주문한 귀족의 이름이 붙어 있다. 최근 출시되는 모델은 영국의 지명을 딴다. 단 윌리엄 왕세손이 20세 기념으로 맞춘 구두에는 ‘윌리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개의 버클이 등을 덮고 있는 윌리엄은 존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라인 중 하나다. MTM 구두는 디자인에 따라 가격이 다르지만 일반 가죽은 990만 원부터, 악어가죽은 2200만 원 선이다.
글=남윤서 기자 baron@donga.com
사진=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촬영협조=에르메네질도 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