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발밑, 바스락… 슬픔 한줌사그락… 추억 한줌
이거야/가을의 꽃이불/바로 이거야/나를 그 위에 눕게 하고/누워서 백운대 넘어가는/구름을 보며/이거야 바로 이거/나는 하루 종일 아이가 되어/뒹굴뒹굴 놀다가/어미가 그리우면/아이처럼 울고/이거야 이거 - 이생진 ‘낙엽소리’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비가 내리는 서울대공원 외곽도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산책코스로 이름났다. 떡갈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 참나무 잎은 이미 길바닥에 떨어져 꽃이불이 됐고, 요즘은 단풍잎들이 하나둘씩 흩날리고 있다. ‘낙엽에 발목이 푹푹 빠지는/산길을 걷는다./한 발자국씩 옮길 때마다/부스럭 부스럭/낙엽이 소리를 내준다./산새소리도 좋지만/낙엽이 내는 소리가 좋다./낙엽길이 이어져서 좋다./낙엽소리 속에는/봄을 재촉하는 보슬비 소리/벌 나비들의 날갯짓소리/무더운 여름날 소나기 소리/도토리가 살찌는 소리…’(최춘해 ‘낙엽’에서). 서울대공원=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길바닥에 깔린 ‘낙엽 꽃이불’. 수북이 넉장거리로 누워 있는 마른 나뭇잎들. 저 멀리 먹빛 하늘 틈새로 아기별이 보일 듯 말 듯 뜨기 시작한다. 나뭇가지엔 아직도 많은 이파리가 파르르 떨며 매달려 있다. 우리는 언제 뿌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언제 가을 햇살에 피를 바싹 말려 몸을 가볍게 할 수 있을까.
과천 서울대공원 삼림욕장 코스(6.92km·지하철4호선 서울대공원역 2번 출구)나 동물원 외곽도로(4.2km)는 발목에 낙엽이 푹푹 빠진다. 황갈색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잎사귀들이 밟을 때마다 바스락! 부스럭! 뻥튀기과자 허리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발바닥이 달착지근하다. 평일에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부분 길가 벤치에 앉아 도시락으로 꿀맛 점심을 먹는다.
서울대공원은 평일 1만여 명, 휴일 4만여 명이 찾는다. 삼림욕장은 천천히 걸어도 2시간30분쯤이면 충분하다. 외곽도로엔 1998년 심은하, 이성재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촬영 장소가 숨어 있다. 고즈넉하다. “사랑이라는 게 처음부터 풍덩 빠져 버리는 건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가는 것인 줄은 몰랐어!” 푯말에 적힌 영화 대사 한 구절이 여운을 남긴다.
낙엽 사뿐히 ‘즈려밟는’ 맛은 어린이대공원, 삼청공원도 못지않다. 어린이대공원(지하철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엔 낙엽길을 별도로 만들어 놓았다. 삼청공원(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나 5호선 광화문역에서 마을버스 이용)은 조용하고 아늑한 맛이 있다. 주변 삼청동 거리의 화랑이나 액세서리 전문점 구경도 쏠쏠하다. 삼청동수제비 등 장안에 소문난 맛집도 많다.
위로부터 남산 은행나무가로수길, 삼청동길, 남산산책길.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낙엽은 ‘나무들의 사리’다. 나무의 날개다. 겨드랑이의 여린 부등깃이다. 한 가지에 피었다가, (저마다) 가는 곳을 모르는(신라 월명스님)’ 외로운 피붙이다. “사그락! 사각!” 솔잎 밟는 소리. “부스럭, 부석!” 떡갈나무 잎 으스러지는 소리. “저벅, 처벅!” 은행잎 뭉근하게 밟는 소리…. 나뭇잎 밟는 소리는 ‘뿌리로 돌아가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찬비가 세차게 내리더니/늦가을 낙엽은 지고/마지막 남은 잎새마저/다 떨군 나무는/1년 동안 가꾸어온/삶의 무게를 다 벗어던졌구나.//이리저리/발밑에 구르는 낙엽은/누군가 이승에 벗어놓고 간/햇살 한 줌/그리움 한 줌/슬픔 한 줌/추억 한 줌(남낙현 ‘늦가을 낙엽은 지고’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