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사랑방 말쿠지에 짚신 몇 죽 걸어놓고
할아버지는 무덤 속을 걸어가시지 않았느냐
그 짚신 더러는 외로운 길손의 길보시가 되고
한밤중 동네 개 컹컹 짖어 그 짚신 짊어지고
아버지는 다시 새벽 두만강 국경을 넘기도 하였느니
아이들아, 수많은 기다림의 세월
그러니 서러워하지도 말아라
눈 속에 익은 까치밥 몇 개가
겨울 하늘에 떠서
아직도 너희들이 가야 할 머나먼 길
이렇게 등 따숩게 비춰주고 있지 않으냐.
송수권(1940~)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그린 오치균 씨의 ‘감’.
형제들 가운데 제일 부지런하고 착실했던 소년은 그때마다 팬티 차림으로 뛰어나갔다.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감나무부터 찾아 행여 생채기라도 날까 노심초사하면서 따고 주운 감들이 소쿠리에 쌓여갔다. 그렇게 모아온 감을 어머니는 옹기 항아리에 담고 끓인 소금물을 부은 뒤 이불로 둘둘 말아 절절 끓는 아랫목에 밤새 잠을 재웠다. 마법처럼 땡감이 단감으로 변신하면 모자는 새벽 첫차에 몸을 싣고 시장에 갔다. “감 사세요”라고 크게 외치는 엄마를 따라 아들도 입을 벌렸으나 정작 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제 서울 보광동을 지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어느 집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꽃보다 화사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감나무는 주홍빛 알전구로 장식한 때 이른 트리인 양 멀리서도 눈부셨다. 가을은 빠르게 물러가고 어느새 자투리 시간만 남았다. 시인의 눈길이 감 수확을 다 끝낸 시점을 향하고 있다. 아무리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아도 감 몇 개는 따지 않고 까치밥으로 남겨둔 사람들. 그 넉넉한 마음자리를 나누던 시절이 그립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