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철학인 영국 경험론의 시조(始祖)격인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자신의 저서 ‘노붐 오르가눔’에서 인간이 올바른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버려야 할 4대 우상(偶像)을 종족, 동굴, 시장, 극장으로 제시했다. 도올 김용옥은 우상을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권위의 상징’으로 정의했다. 자유주의 사상의 기본이 된 사회계약론은 평등하고 이성적인 개인들 간의 계약을 사회와 국가 성립의 근거로 보았다. 당연히 우상은 타도 대상이었다.
▷20세기 들어 무산자(無産者) 혁명으로 전 세계의 절반 가까이를 장악한 공산권은 숙명적으로 우상화 작업에 골몰했다. 부족한 정통성을 상징 조작으로 미화하지 못하면 사회를 통제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했다. 이집트 투탕카멘을 본 소련의 스탈린은 ‘혁명의 아버지’ 레닌이 1924년 사망하자 유족의 반대에도 레닌을 붉은 광장 영묘(靈廟)에 영원히 모셨다. 살아생전에 이미 ‘만능의 천재’ ‘위대한 조직자’이자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우리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던 스탈린은 전국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며 영생의 혁명지도자가 되고자 했다.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6×4.6m 크기의 초대형 초상이다. 광장 건너편엔 방부 처리된 마오쩌둥이 영면하고 있고 1위안에서 100위안까지 중국에서 발행되는 지폐 6종의 인물은 모두 마오다. ‘마오의 말 한마디는 우리의 일만 마디를 능가한다’며 시작된 것이 문화대혁명이다. 홍위병들은 마오를 우상화하는 대규모 캠페인을 벌이며 마오에게 충성하지 않는 고위 공직자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북한의 김일성 왕조는 개인 우상화를 뛰어넘어 가문(家門)을 우상으로 만들었다. 북한은 3대 승계자 김정은을 우상화하는 560m짜리 글귀를 세웠다. ‘선군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란 글귀가 얼마나 큰지 구글 어스로도 선명히 보인다. ‘솔방울로 수류탄 만들고, 가랑잎 타고 대동강 건넜다’(김일성) ‘생애 첫 라운딩서 홀인원 11개 포함, 38언더파를 쳤다’(김정일)에서 나온 DNA를 물려받았다. 기원전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동굴에 갇힌 죄수들이 빛이 들어와 만들어진 그림자를 우주인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동굴의 우상이라고 했다. 북한 주민은 ‘동굴의 우상’이 허상임을 언제나 깨달을 수 있을까.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