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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한줄]허전한 내 얼굴

입력 | 2012-11-24 03:00:00


“멀리서 보이는 불빛은 행복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옥탑방 왕세자’(SBS·2012년)

나흘 전 동생이 여행 가방의 명품이라 불리는 투미(TUMI) 상표가 찍힌 지갑 하나를 들고 왔다.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손님이 줬어”라고 짧게 덧붙였다. 선배 한 사람이 메고 다니던 투미 가방이 떠올랐다. 여자친구가 사준 것이라며 자랑하던 선배가 말해준, 70만 원이라는 가격과 함께. 지갑도 만만치 않게 비쌀 것 같았다.

“이야, 이런 것도 받아보고. 수의사가 좋긴 좋네.”

“이런 손님이 더 무서워. 나중에 강아지가 조금 잘못되기라도 하면 바로 멱살 잡히는 거야. 더 난리를 치지.”

이미 여러 번 당해본 경험이 있는 눈치였다. 가끔 동생은 한밤중에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담배 한 개비를 물고 현관문을 소리 나게 닫으며 뛰어 나가곤 한다.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에서 세나(정유미)가 말한다. “멀리서 보이는 불빛은 행복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세나는 나쁜 여자였다. 수많은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했고 진정성이라고는 없이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성공을 위한 도구 정도로 여겼다. “어떻게 저럴 수가”라는 말을 연발하게 만드는 악녀의 전형이었다. 조선시대에서 타임슬립(time slip·시간여행을 뜻함)해 현대로 온 왕세자 이각(박유천)은 처음엔 포장된 세나의 겉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연못에 빠져 죽은 왕세자빈과 똑같이 생긴 세나와 자신이 불시착한 옥탑방 주인 박하(한지민) 사이를 오가며 갈팡질팡했다.

악녀이기만 한 세나가 안쓰럽게 보인 적이 있다. 이각과 함께 남산타워에 올라 야경을 내려다보며 먼 불빛에 대한 대사를할 때였다. 이어 그녀는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안을 들여다보면 싸우는 사람들도 있고 슬프거나 외로운 사람들도 많겠죠”라고 했다. 욕망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그녀가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아픈 현실의 굴레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기자는 멱살 잡힐 일은 없잖아. 어디 가도 늘 대접받고.”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오며 동생이 말했다. 둘 다 집에 와 잠만 자고 나가기 바쁘니 그나 나나 서로의 먼 불빛만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보여?”

“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내 여자친구의 친구가 물어봐달라고 했대.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 거야?”

“많이 읽고, 많이 써봐야지.” 아마 그 친구가 수없이 들었을 원론적인 이야기들….

문득 그 여자친구의 친구에게 소설가 은희경의 소설을 한번 읽어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 기자 남편을 둔 그녀의 작품 속에는 유난히 많은 기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기자들은 하나같이 악역이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 등장하는 한 여성지 기자는 술자리에서 들은 여배우의 사생활 이야기를 잡지에 기고해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리고, ‘마이너리그’의 스포츠신문 기자는 정치적 계산이 빠르고 비열한 인물이다.

드라마에서 세나의 말을 듣고 이각이 묻는다.

“세나 씨는 어떤 편인가요? 멀리서 봐야 아름다운가요, 가까이에서 봐야 아름다운가요?”

“글쎄요. 저는 제 모습이 안 보이니까요.”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 속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점점 더 허전해지는 앞머리에, 탄력을 잃은 피부. ‘가까이’는 이제 글러 먹었다.

“직접 그 친구랑 통화 한번 해줘.” 소파에 앉아 여자친구와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던 ‘동거인’이 말했다. 그래. ‘멀리서’나마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desdemona98@naver.com

동그라미 동아일보 기자. 가까이에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