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YS 담판 결렬, DJP 막후 합의, 盧-鄭 여론조사
1987년 직선제 부활 이후 야권은 항상 단일화를 대선의 기본 전략으로 삼았다. 단일화 방법도 계속 진화했다. 1987년 대선 당시 야권의 유력 대선후보였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YS) 총재와 김대중(DJ) 고문은 단일화 방안을 놓고 대립했다.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YS가 전당대회에서 경선을 통해 후보를 정하자고 주장하자 DJ는 탈당해 평민당을 창당하고 독자 출마를 감행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몇 차례 만나 단일화 협상을 했으나 서로 상대방에게 양보를 종용했을 뿐이었다. 당시는 여론조사가 일반화되지 않아 담판에 의한 후보 단일화 말고는 선택할 방식도 없었다. DJ는 유세장에 모인 청중의 수, 청중의 열기, 후보에 대한 평판, 언론의 논평, 각 단체의 지지 성명 등을 토대로 후보를 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1997년 대선에서 야권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JP) 자민련 총재 사이에 1년 넘는 막후 협상 끝에 내각제 개헌 추진과 대통령-총리의 역할 분담, 내각을 양분하는 권력 분점 방안에 합의해 DJP연합에 성공했다. DJ를 대선후보로 정한 것도 합의로 결정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여론조사 방식을 놓고 27시간의 마라톤협상이 결렬되는 등 진통을 겪었다. 당시에는 역선택 방지를 위한 여론조사 무효화 기준이 협상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또 전문가들은 오차범위 이내로 조사결과가 나올 경우의 문제, 조직 개입에 의한 왜곡 가능성, 단시간에 이뤄지는 조사의 객관성 보장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결국 막판 합의가 이뤄져 10시간 동안 여론조사가 실시됐고 2개의 조사 중 1곳에서 오차범위 내의 승리를 거둔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를 누르고 단일 후보가 됐다. 올 대선을 앞두곤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 단일화 방식을 둘러싼 ‘치킨게임’ 끝에 결국 안 후보가 핸들을 꺾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