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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무자비한 대중의 마녀사냥, 분별없는 한국사회 병폐 고발

입력 | 2012-11-27 03:00:00

창작 연극 ‘숲 속의 잠자는 옥희’ ★★★★




연극 ‘숲 속의 잠자는 옥희’에서 1인 2역을 능숙하게 소화한 배우 이지하와 극이 전개되는 중간 샤를 페로의 원작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 스크린. 이지하 앞의 소품은 극중 배우 옥희의 라이벌 애경이 자살하면서 옥희에게 보낸 물레다. 이 물레는 누구나 마음 깊이 감춰둔 시샘과 질투를 상징하기도 하고, 우리의 벌거벗은 욕망이 투사된 가상의 네트워크 공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극단 백수광부 제공

마녀사냥은 중세 유럽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 도처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누군가 한 명을 ‘마녀’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하고 무리 지어 돌팔매를 가한다. 인터넷에서 무수히 벌어지는 ○○녀, △△남에 대한 신상 털기와 무차별적 인신공격은 극단적 예에 불과하다.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스타가 아차 실수만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언어폭력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아이들의 ‘집단 따돌림’을 한탄하면서 어른들도 무의식적으로 똑같은 짓을 저지른다. 최치언 작가와 이성열 연출이 다섯 번째로 호흡을 맞춘 창작극 ‘'숲 속의 잠자는 옥희’는 마녀가 등장하는 동화를 빌려 이런 한국 사회의 마녀사냥을 풍자한다.

연극의 왼편을 차지하는 4×3=12개의 대형 모니터로 구성된 스크린에는 원작 동화를 구현한 애니메이션이 토막토막 투영된다. 그리고 나목으로 숲을 형상화한 무대 복판에 있는 침대에서 한 여인이 잠들어 있다. 연극의 주인공 옥희다.

옥희는 왜 잠든 것일까. 동화에서처럼 마법에 걸린 물레의 바늘에 찔려서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저주의 마법을 건 것일까. 연극은 그 마법을 풀어 옥희를 영원의 잠에서 깨어나게 할 것처럼 전개된다.

하지만 극중극의 묘미를 한껏 살린 전작 ‘미친 극’의 극작가 최치언은 이야기의 물레를 돌려 소설가 옥희의 씨줄과 여배우 옥희의 날줄을 엮어놓는다. 왕년의 인기 작가였지만 표절 논란, 유부남과의 스캔들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옥희는 5년 만에 회심의 소설을 준비한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패러디해 두 여배우의 질투와 갈등을 다룬 소설이다. 하지만 대학 시절 문학적 재질은 자신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했던 대학 동창 란(김현영)이 같은 소재로 쓴 원고를 놓고 간 뒤 자살하자 그 이야기의 원작자가 자신인지 란인지 혼란에 빠진다.

마침 여배우 옥희는 최근 출연한 영화의 세계적 성공으로 최고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다 한때 열등감의 원천이었던 동료 배우 애경이 축하선물로 보낸 물레를 받고 뒤이어 애경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옥희에게 찬사를 늘어놓던 여론은 애경이 옥희에게 배역을 빼앗긴 뒤 비관 자살한 것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붓는다.

여기에 작가 옥희의 신작이 옥희와 애경의 사연과 닮은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그러다 배우 옥희가 영원의 잠에 빠져들자 비난의 화살은 다시 작가 옥희를 향한다. 작가 옥희는 자신의 소설이 표절이라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그런 비난에 제대로 대응도 못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이야기를 풀 수 있는 열쇠는 옥희에게 있다. 두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은 왜 같은 옥희일까. 얼핏 조금씩 달라보여도 둘의 이야기는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악마의 방식’이라고 맹비판한 희생양 메커니즘의 무한반복에 불과하다. 욕망의 상호모방이 증폭시킨 시샘과 질투, 그 적개심 발산을 위한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집단폭력, 그리고 그 폭력에 수반되는 죄의식을 통한 정화….

동화 속 물레에 저주를 건 마녀가 현실에선 누구일까. 두 옥희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란과 애경? 아니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게 된 두 옥희? 아니다. 인터넷이란 욕망의 물레를 끊임없이 돌리며 희생양 메커니즘의 실을 무한히 잣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배우 옥희와 작가 옥희 1인 2역을 소화한 배우 이지하는 3중 극중극 구조를 지닌 일본 번역극 ‘연애희곡’에서 보여주었던 능수능란한 변신술을 통해 서로 다른 듯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를 닮은 만인(萬人)의 초상을 페이소스 짙은 웃음의 연기로 형상화해냈다. 변덕스러운 여론을 대변한 김기자 역 최지훈의 능청맞은 연기는 지켜보는 기자의 가슴을 뜨끔하게 했다. 스포츠 중계의 캐스터와 해설가 역할을 수행하며 극의 흐름을 적절히 견인한 견자(見者·이태형)와 의사(박혁민)의 기지 넘치는 만담도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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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만5000원. 02-889-3561∼2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