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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 Up]金과장은 오늘도 업무시간에 이력서를 쓴다

입력 | 2012-11-28 03:00:00


“우리 회사는 비전이 없다”는 선배의 말에 중견 식품회사에 다니는 3년차 직장인 최모 씨(28·여)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쥐꼬리만 한 월급은 참을 수 있지만 이 회사에서 자신이 성장할 수 없다는 두려움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불황, 구조조정에 밖으로 내쳐지는 상사들이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업무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최 씨는 “채용정보업체에 경력사원 입사 지원서를 낸 뒤 주중에는 웹 서핑을 하며 새 직장을 찾고, 주말에는 자격증 공부를 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산업부가 국내 1위 취업포털사이트인 잡코리아에 등록된 2008년 이후 이직 희망자 300만 명을 분석한 결과 최 씨처럼 언제든 회사를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직장인들이 올해 들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 LG처럼 규모가 큰 10대 그룹(공기업 포함)의 직장인들은 상대적으로 이직 희망자가 적었지만 10대 그룹이라도 사세(社勢)나 향후 전망에 따라 사정은 달랐다. 한국 직장인들 사이에 이른바 ‘파랑새 증후군’이 만연한 셈이다.

○ 10대 그룹 3% vs 그 외 기업 28%

올해 1∼10월 삼성, LG, SK 등 10대 그룹 직원들의 이직 희망자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9% 늘어나는 데 그쳤다. 반면 나머지 기업의 이직 희망자는 28.1% 증가해 대조적이었다.

잡코리아 측은 “10대 그룹 직원과 여타 회사 직원 간 인식 차가 이처럼 크게 벌어진 것은 최근 5년 사이 처음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2011년까지는 10대 그룹을 제외한 기업의 이직 희망자 증가율은 연평균 2.8∼6.3% 수준으로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같은 기간 10대 그룹은 ―2.7∼3.9%의 증가율을 보였다.

올해 들어 10대 그룹 외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가운데 이직 희망자가 급증한 것은 특히 입사한 지 10년이 안 된 젊은층이 대거 파랑새 증후군에 빠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5년차 이직 희망자 증가율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최고 3.7%에 그쳤지만 올해는 24.3%로 증가했다. 지난해 이직 희망자 증가율이 3.0%였던 6∼10년차도 올해는 24.2%로 아주 높아졌다.

○ 대기업별로도 천양지차

10대 그룹에 속하는 대기업이라도 이직에 대한 직원들의 고민에는 큰 온도 차가 있었다. 글로벌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세계시장을 이끌고 있는 삼성전자 등 삼성그룹은 이직 희망자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 감소했다. 삼성그룹 직원들은 이 외에도 조사대상 기간 내내 이직 희망자가 줄어드는 추세였다.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한국전력공사 등도 직원이 이직 지원서를 잡코리아에 낸 건수가 감소했다.
▼ 10대그룹外 기업 ‘파랑새족’ 28% 늘어 ▼

반면 나머지 6개 그룹은 증가세였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한때 고전했던 LG그룹은 올해 지원서 등록 건수가 21.6% 늘었고, SK플래닛 분사와 SK하이닉스 인수 등 조직에 부침(浮沈)이 있었던 SK그룹도 증가율이 두 자릿수(10.7%)였다. 포스코그룹(11.3%)과 한국토지주택공사(14.8%)도 이직 희망자가 늘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 직장인은 근무여건에 불만을 느끼기보다는 상대 기업에서 고액 연봉을 제시하면서 스카우트하는 사례가 많다”며 “다만 급변하는 경제상황 때문에 대기업 간에도 이직을 고민하는 직원 수가 차이 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 직장을 떠나는 이유

동아일보는 직장인들에게 널리 퍼진 파랑새 증후군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이직을 준비 중인 1∼5년차, 6∼10년차, 11∼15년차 직장인 4명씩 12명을 인터뷰했다. 그 결과 연차별로 파랑새 증후군을 겪는 이유가 조금씩 달랐다.

1∼5년차 직장인 4명 중 3명은 ‘예상과 현실 간 괴리’를 꼽았다. 취업이 어려워지니 업무나 근무여건 등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식으로 취업했다가 예상했던 것보다 근무여건이 열악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경우다.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2년차 직장인 이모 씨는 “한 취업사이트에서 대졸 초임 연봉이 3000만 원이라고 들었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월급명세서에 200만 원도 안 찍히는 때가 허다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연봉, 근로조건을 자세히 밝히지 않았거나 과장했고, 회사의 직무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던 점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한 병원의 행정직인 나모 씨(26·여)는 “의료행정 분야 전문가로 키워주겠다는 회사의 말을 믿고 입사했지만 내가 할 일은 결국 의사들 뒤치다꺼리였다”고 하소연했다.

업무 숙련도가 높아지는 대리, 과장급인 6∼10년차 4명 중 2명은 돈보다는 ‘경영진과의 갈등’을 주요 이유로 꼽았다. 30대 대기업의 연구원(8년차)으로 있는 정모 씨(34)는 “어렵게 들어온 회사이고, 지금까지 젊음을 바치며 버텨온 세월이 있는데 단순히 돈 몇백만 원 더 받는다고 자리를 옮기고 싶지는 않다”며 “현장을 모르는 경영진이 자신들의 과거 경험만 믿고 엉뚱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게 괴롭다”고 털어놓았다.

대기업 직장인 중에서는 조직 내에서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의견도 나왔다. 전자회사에 다니는 유모 씨(9년차)는 “6∼10년차만 돼도 장차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대부분 알 수 있다”며 “회사의 수준을 조금 낮추더라도 더 오래 다닐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1∼15년차 이직 희망자가 최근 증가한 것은 빠른 세대교체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자부품 중소기업에 다니는 박모 씨는 “중소기업의 경우 10년차를 지나면 회사에서 관리하는 극소수 핵심인력을 제외하고는 버티기 힘들어지는 게 현실”이라면서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는 창업이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첫 직장으로 대기업을 고집하지 않고 중소·중견기업에서 인정받아 대기업으로 이직하려는 선진국형 취업문화가 본격화한 것으로도 해석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례도 중소기업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동아일보 청년드림센터 자문위원인 박철우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어렵게 키운 인력이 기업 비밀을 들고 나가면서 기술 유출사건이 발생하거나 기존 아이템으로 창업하면서 기존 회사의 경쟁자로 돌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 파랑새 증후군 ::

벨기에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의 주인공들이 행복을 뜻하는 파랑새를 찾아 헤매듯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상을 찾아 떠도는 젊은이나 직장인들을 빗댄 신조어.

▶[채널A 영상] 대졸 첫 취업자 60% 4년 이내 이직, 그 이유는?

정진욱·김지현 기자 cool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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