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정(1967∼ )
닥터 박 왜 자꾸 항문 끝에 힘을 주라는 거요 내 지금 비록 네 발 달린 짐승이 되어 침대 위를 기고 있지만 이곳은 분명 산부인과의 분만실이오 그런데 자꾸 항문 끝에 힘을 주라니 날보고 지금 똥을 낳으라는 말이오 똥 아닌 것을 낳으라는 말이오 닥터 박 어쨌든 난 지금 당신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 어디 한번 죽을 힘을 다해 항문 끝에 힘을 주겠소
닥터 박 이곳은 화장실이 아닌 건 분명한데 난 지금 도저한 핏기가 묻은 희고 말랑한 똥을 낳은 것 같소 이 똥을 품에 안으며 난 이 희한한 똥과 사랑에 빠질 것을 예감하고 있소 이것이 자라서 진짜 똥이 되어도 내 사랑은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처럼 희고 말랑할 것 같음도…닥터 박 항문 끝에 힘을 주라는 당신의 조치는 매우 적절하였던 것 같소
성미정의 시들은 거침없고 유쾌하다. ‘이것이 자라서 진짜 똥이 되어도 내 사랑은’같이 뭉클한 구절도 있지만, 짐짓 능청스럽게 시를 여는 ‘닥터 박’부터 빙긋 입술 끝이 올라가면서 웃음을 예감하는 독자의 기대를, 시인은 이번에도 저버리지 않는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