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
오랫동안 그 나무를 잊고 지냈다. 내 삶에만 골몰한 나머지 사지가 절단된 나무의 삶에는 무관심했다. 처음엔 그 나무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잘라 버릴 수가 있는가. 너무나 인간 위주다. 나무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어떻게 인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가’ 하고 안타까워했으나 곧 잊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그 나무가 의연한 자세로 겨울을 기다리며 묵묵히 나를 바라본다.
나무는 싹둑 잘린 윗동 주변에 그래도 몇 개의 새 가지를 뻗어 잎을 달고 있고, 그 아래 몸통 몇 군데에도 가지를 길게 내뻗고 있다. 그는 그렇게 새로운 가지를 뻗기까지, 봄과 여름을 지나고 겨울을 기다리는 이 순간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인간이 원망스러웠을까. 그러나 그의 모습에는 인간을 원망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며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왔다’고 환히 미소 짓는다. “당신도 나처럼 견딤의 자세로 오늘을 살아라. 인생의 고통에 대한 가장 올바른 자세는 극복의 자세가 아니라 성실한 인내의 자세다” 하고 말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나무를 함부로 대한다. 나무가 없는 도시는 죽음의 도시임에도 하찮은 소비재처럼 여긴다. 몇 해 전 한 여고에서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교문 확장공사를 하면서 30년 넘게 거목으로 자란 플라타너스 몇 그루를 잘라버렸다. 교문이 더 넓게 확장됨으로써 진입로에 있던 나무 몇 그루가 희생당한 것이다. 나중엔 교문 측면에 남겨 놓았던 나무 한 그루조차 아예 밑동을 잘라버렸다.
지금도 길바닥에 보도블록처럼 남아 있는 나무 밑동을 보면 ‘왜 건강하게 잘 살고 있던 나무를 잘라버렸을까. 교문 앞에 아름다운 나무가 있으면 그곳을 매일 오가는 여고생들의 마음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다가 교직원 차량 출입에 방해가 되어 그렇게 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그만 그 이기심에 화가 치민다.
언젠가 호주 시드니에 있는 친지 집에 며칠간 머물 때였다. 나무가 울타리처럼 집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부러워하자 친지는 오히려 나무를 탓하는 말을 했다. 집이 좁아 증축공사를 하려고 하는데 시에서 나무 때문에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마당 한쪽에 있는 나무의 뿌리가 증축할 위치에 닿아 있어 허가를 내주면 결국 나무에 손상을 주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얼마나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난 자연중심적 사고의 실천인가. 시드니 도심에 있는 ‘하이드파크’에는 나무들이 울창해 원시림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듯하다. 그곳을 산책하는 시민들은 아름다운 나무들 때문에 아름답고 평화스러워 보인다. 이는 자연이 중심이 되는 도시가 결국 인간을 위하는 도시가 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올해도 연말연시를 맞아 거리의 나무들은 작은 전구가 달린 전깃줄에 온몸을 친친 감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밤마다 형형색색의 현란한 불빛에 잠 못 이루고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인간은 나무에게 그런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한다. 나무를 인간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인간은 나무 없이 살지 못한다.
겨울을 못견디면 봄도 오지 않는다
다시 창밖의 나무를 바라본다. 나무는 여전히 말뚝 같은 몸매를 하고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본다. 인생에 어떠한 고통이 있다면 사지가 절단됐던 저 나무처럼 오늘을 견뎌야 한다. 그 나무에서 새로 뻗어 나온 고통의 가지는 바로 인내와 희망의 가지다. 만일 그 나무가 지난 봄날의 고통을 견디지 못했다면 겨울의 고통 또한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겨울을 견뎌내지 못하면 봄도 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해마다 봄이 오는 까닭은 겨울을 견뎌내는 그런 인내의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