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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joy]인제 자작나무 숲에 가다

입력 | 2012-11-30 03:00:00

쌩∼ 쌩∼칼바람… 알몸이 떨린다… 마음이 아리다




뽀얀 맨살로 칼바람을 맞고 있는 강원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자작나무숲. 쩡! 쩡! 얼어붙은 산등성에 눈부시게 하얀 종아리와 목덜미를 통째 드러내놓고, 겨울의 최전선에서 강철대오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옥양목 은백색의 순백의 정령들. 가늘고 여리지만 이를 악물고 서있는 숲 속의 정령들. 러시아 사람들은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 그러다가 죽으면 자작나무 껍질 옷을 입고 묻힌다. 알타이무당들은 자작나무 껍질로 ‘하늘의 별을 담는 주머니’를 만들었다. 금은 싸라기별을 자작나무 망태에 담았다. 인제=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내가 자작나무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작나무가 하얗기 때문이고

자작나무가 하얀 것은 자작나무 숲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친구여, 따뜻한 남쪽에서 제대로 사는 삶이란

뭐니 뭐니 해도 자작나무를 찾아가는 일

자작나무숲에 너와 내가 한 그루 자작나무로 서서

더 큰 자작나무숲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면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겠지

어라, 자작나무들이 꼭 흰옷 입은 사람 같네, 하면서

-안도현 ‘자작나무를 찾아서’ 부분
그렇다. 한겨울, 강원도 인제에 가면 자작나무 숲이 있다. 살결 뽀얀 ‘순백의 정령들’이 당차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북풍한설 칼산에 알몸으로 떼 지어 서 있다. 겨울 자작나무는 갈매나무처럼 정갈하다. 기품 있고 고결하다. 하얗고 긴 종아리가 안쓰럽다. 흰 목덜미가 애틋하다.

자작나무는 산비탈 높은 등성이에 하얀 잔가시로 박혀 있다. 촘촘한 ‘참빗 가슴뼈’ 틈새로 설핏한 햇살이 비낀다. 가녀리다. 바람이 불면 여리게 몸을 떤다. 쌩! 쌩! 칼바람에 몸이 아리다.

자작나무는 겉은 연약하지만 속은 강하다. 자작나무 숲에선 북방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만주벌판의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여진 몽골족 추장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곰과 승냥이 여우 울음소리도 울린다. 땡땡 얼어붙은 얼음산에서 커엉! 컹! 늑대 울음소리를 낸다.

강원 인제군 남면 수산리 자작나무숲의 나무는 100만 그루가 넘는다. 제지회사 동해펄프(현 무림P&P)가 10년 동안(1986∼1995년) 600ha(약 181만5000평·응봉산 12골짜기) 땅에 180만여 그루를 심었다. 길게는 25년, 짧게는 16년 정도 나이를 먹었다. 큰 것이 밑동 지름 20cm, 키 15m쯤 된다. 군데군데 휘어진 나무가 안쓰럽다.

인제읍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아늑하다. 하얀 요정들의 순백공화국. 눈밭의 ‘숲속 작은 나라’. 25ha(7만5000여 평)에 4만여 그루로 수산리에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한 곳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어 빽빽하다. 숲에 다가서면 향긋한 나무 냄새가 후욱! 코에 스며든다. 머릿속이 박하처럼 맑아진다. 바로 자작나무 특유의 ‘자일리톨 껌’ 향기다. 자작나무 사이의 산책 코스가 오붓하다. 1코스 0.9km, 2코스 1.5km, 3코스 1.1km. 다 돌아봐도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매끈한 자작나무 몸을 만져보는 맛이 그만이다. 단단하면서도 촉촉하다.

수산리 자작나무 숲은 트레킹 코스로 으뜸이다. 수산리∼어론리 19km 임도코스도 5, 6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임도는 해발 450∼580m에 걸쳐 있다. 대체로 평탄하지만 눈밭길이라 아이젠 준비는 필수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도 산림초소에서 3km쯤 걸어야 한다. 승용차는 산림초소 부근 도로에 세워둬야 한다. 산길은 역시 양지바른 곳을 빼곤 눈밭이다. 아이들과 같이 걸어도 큰 무리가 없다.

자작나무는 북위 45도 위쪽 추운 지방에서 잘 자란다. 기름기가 많아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자작나무다. 우리나라에선 백두산 개마고원 일대(북위 42도)가 빽빽하다.

그렇다. 옛 개마고원 사람들은 자작나무로 움막을 짓고, 자작나무 껍질로 지붕을 얹었다. 자작나무 장작으로 밥을 짓고 군불을 땠다. 자작나무 횃불로 길을 밝혔다. 산삼을 캐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서 고이 보관했다. 여름날 밥이 쉬지 않도록 자작나무 껍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숨을 거두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여 땅에 묻혔다.

원뿔모양의 자작나무집.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의 ‘백화 白樺’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