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사회부장
엽기는 검사의 행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엽기 2탄은 피해여성의 사진이라며 인터넷과 SNS에 정체불명의 사진들이 유포되는 세태다. 사건과 무관한 사진 속 여성은 어떤 심정일까. 만약 떠도는 사진들 중에 실제 피해여성이 있다면 그 여성과 가족의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 반드시 유출자를 찾아내 엄벌해야 할 중대 범죄다.
사진 유출은 엄벌해야할 중대범죄
성범죄의 원인과 책임의 일단을 피해여성에게 돌리려는 이런 시각의 근저엔 뿌리 깊은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올여름 성폭행 사건이 빈발하자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다니니 그렇지”라는 반응이 나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성의 노출과 성폭행은 직접적 상관관계가 없으며, 대부분의 성범죄자는 야한 차림의 여성을 보고 순간적인 욕정에서 범행하는 게 아니라, 작정하고 계획적으로 대상을 물색한다는 범죄 통계에도 불구하고 이런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 뇌물 사건으로 몰고 가려는 검찰의 고집도 어이가 없다. 뇌물죄로 검사를 처벌한다는 것은 피해여성이 자신의 성을 뇌물로 바쳤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문제의 여성은 검찰에 출석할 때 남편과 동행했다. 지척에 남편을 기다리게 해놓고 검사에게 성상납을 한다는 게 가능할까.
설사 자발적 관계라고 볼 소지가 일부 있다 해도 검찰이 강제성이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은 다른 사건 처리와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의 진술이 우선적 가치를 지니는데 이번 사건 피해여성은 당시 성관계가 강제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조계에선 검찰이 뇌물죄에 집착하는 것은 부주의한 검사가 ‘꽃뱀 피의자’와 벌인 개인적 일탈행위로 축소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강간치상이나 폭행·가혹행위죄 등을 적용할 경우 개인비리가 아닌 검찰의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돼 조직이 받을 타격이 더 커지므로 이를 차단하려 한다는 분석이다. 검찰이 진상을 파헤쳐 엄벌하겠다고 나섰지만 속내는 조직보호라는 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 특권 이번엔 뿌리 뽑아야
더 근본적으로는 검사가 피의자의 생살여탈권을 쥔 절대 신의 위치에 군림하게 해주는 견제받지 않는 특권에 사건의 뿌리가 닿는다. 문제의 검사실에서 폐쇄회로(CC)TV 없이 피의자를 심문하는 게 가능했다면 이는 시대착오적 인권 사각지대가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올 초 경남 밀양에서 검사의 경찰관 모욕 사건이 터진 뒤 경찰이 CCTV를 보여달라고 요구하자 검찰은 “CCTV가 꺼져 있어서 보여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는 검사가 임의로 CCTV를 켜고 끌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경찰관이 CCTV 없는 밀실에서 피의자를 조사하거나 CCTV를 마음대로 껐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날 서울동부지검 별관 3층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 사회에 음습하게 온존해 있는 구시대의 잔재들을 총체적으로 드러내줬다.
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