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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눈/폴 크루그먼]‘재정 유령’에 맞서 싸워라

입력 | 2012-11-30 03:00:00


폴 크루그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3년 동안 미국 재정정책 논의를 좌우한 긴축론자에겐 지금이 힘든 시기다. 이들이 예견한 재앙은 그런대로 잘 억제되고 있다. 미 정부의 부채 우려에도 투자자들은 위축되지 않았다. 금리는 사상 최저치다. 지금 미국 경제가 맞이한 명백한 위협은 적자를 충분히 줄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자를 지나치게 많이 줄이는 것이다. 큰 폭의 세금 인상과 지출 삭감이 올해 말 한꺼번에 놓여 있다. 경제 불황 시기에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이것이 ‘재정 절벽’이다. ‘긴축 폭탄’이라고 하는 편이 의미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얼핏 긴축론자의 영향력이 위축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와 비슷하다. 수많은 조직이 하나의 몸통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운영된다. 몸통을 파헤치면 피터 피터슨이 나온다. 사모펀드로 돈을 번 억만장자가 배후 핵심인 것이다.

지금도 긴축론자는 주장을 굽힐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초당적 단체인 ‘부채를 해결하라(Fix the Debt)’는 사회보장과 건강보험 분야 지출 감축을 주장하면서도 그 핵심 과제를 세율 인하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골드만삭스처럼 감세로 이익을 얻는 대기업들이 요구하는 바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런 선동을 그대로 따라야 할까. 아니다. 허다한 위선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은 사실과 달랐다. 그들이 선동하는 재앙의 밑그림은 완전한 허구다. 이는 어느 날 투자자들이 미국의 예산 능력에 대한 신뢰를 접고 미 국채를 대거 시장에 내놓으면 금리가 치솟아 대공황을 방불케 하는 경제침체에 빠진다는 얘기다. 최근 그리스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솔깃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그리스가 아니다.

미국은 자국발행 통화를 갖고 있다. 미국의 모든 부채는 자국 통화, 달러로 이뤄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그리스와 달리 돈이 마를 수가 없다. 미 정부는 화폐를 찍어낼 권한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미국이 부채로 재정 디폴트 위기를 겪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딱 한 가지 위협이 있다. 공화당이 부채상한선을 핑계 삼아 국가를 볼모로 삼을 가능성이다. 그것만 없다면 위기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부가 부채를 갚으려고 화폐를 찍어내면 인플레이션 위험이 커지지 않을까? 불황이 계속되는 한 그럴 염려는 없다. 이는 지금 미국 경제에 위협이 아니라 도움을 줄 것이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기업과 가계로 하여금 현금 보유 비중을 줄이게 한다. 달러 약세는 미국의 수출 산업에 힘이 된다.

긴축론자의 우려는 한 번도 맞은 일이 없다. 지금까지 발생한 재정 디폴트 사례는 그리스처럼 자국발행 통화가 없거나 1990년대 아시아 국가들처럼 외환 부채가 많은 경우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프랑스처럼 자국 통화로 큰 부채를 안았던 국가들이 통화가치 하락으로 곤란을 겪은 바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한다는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한 발 물러나서 보자. 수년간 예산긴축주의자들은 과다한 부채로 인한 재앙을 경고하며 워싱턴을 압박했다. 그런 위기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분명하게 믿는 투자자들이 미국 채권을 사들이는 동안에도 말이다. 경제 분석가들은 그런 재앙이 일어날 수 없는 까닭을 누누이 설명해 왔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재앙이 발생한 적이 없다.

이젠 워싱턴이 허구로 만들어진 위협에 대한 걱정을 멈출 때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몰아가기 위해 괴담을 퍼뜨리는 이들과 맞서야 할 때다.

폴 크루그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