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1933 라오창팡’
재활용 건물들의 신선한 충격
상하이 도심의 많은 건물은 새 생명을 얻은 것들이다. 번영의 시기에 태어난 근대의 건축물들은 용도가 다해 애물단지가 될 뻔했지만 리모델링을 거쳐 문화와 예술의 명소로 재탄생했다. 서울의 정수장이었던 선유도가 생태공원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받았던 신선한 기쁨을 이번 상하이 여행에서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학술문화교류센터를 재단장해 미술관으로 만든 와이탄(外灘)미술관은 전시실의 다양한 색깔을 통해 더없이 즐거운 관람 환경을 제공했다. 라오마터우(老碼頭)는 부둣가의 기름 제조공장에 예술가를 위한 작업실과 문화시설을 들여놓아 독특한 느낌으로 시민들을 유혹했다.
중국 현대미술은 이미 세계 미술시장의 40% 이상을 점유해 미국과 영국을 앞섰다. 이제는 ‘현대미술의 메카’ 자리까지 넘볼 기세다(물론 작품의 진위 문제나 가치에 대한 거품 논란은 있다).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는 예술 발전을 받쳐주는 막강한 인프라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심의 공장지대가 사라진 땅에 이내 상업시설이 들어서곤 한다. 이에 비해 중국에선 국가가 도심 곳곳의 낙후된 시설물들을 예술가들이 재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오늘 그림에 담은 복합문화센터 ‘1933 라오창팡(老場坊)’은 한국에서 온 그림쟁이에게 부러움을 가득 안겨준 상하이의 재활용 건물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도살장 같지 않은 묘한 매력
라오창팡은 영국 건축가 스테이블포드가 1933년 만들었다. 영국식 건축에 바실리카 양식(직사각형의 성당 건축 형태로, 초기 교회에 많이 쓰였음)을 혼합한 모습이다. 원래는 도축시설로, 에어컨 없이 실내 온도를 유지할 수 있게끔 설계됐다. 이곳은 당시 상하이에서 소비하는 육류와 육류가공품의 대부분을 공급하던 세계적인 규모와 격식을 갖춘 도축시설이었다. 1970년대 도축 관련 시설이 교외로 옮겨지면서 잠시 문을 닫은 뒤 제약공장으로 사용됐지만, 2002년에는 그마저 떠나버렸다.
하지만 2006년 반전이 시작됐다. 우수 역사건축물로 지정된 뒤로 특색 있는 상가가 들어섰고, 문화 행사가 준비됐다. 진정으로 획기적인 탈바꿈이 진행됐다. 건물을 돌아다녀 보면, 극동지역 최대의 도살장이었다는 과거의 흔적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현재의 라오창팡은 본래 모습인 도축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묘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예전의 아우성이 사라진 동그란 아트리움(안뜰)엔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테세우스가 제거한 미노타우로스(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괴물)의 텅 빈 미궁처럼 깊은 상실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먹먹함은 ‘문화’라는 인간의 또 다른 욕구에 보기 좋게 감싸 안겨 이내 희미해지고 말았다. 라오창팡은 이제 더는 도축장이 아니니까 말이다.
도움말=장유정 에이랩 큐레이터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