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는 하체가 튼튼해야 좋은 투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어릴 때부터 오리걸음으로 가파른 고갯길을 올랐다. 하체를 강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병적(病的)인 정도에 이를 만큼 달리기에 집착했다. 1994년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에는 팀 훈련 2시간 전부터 야구장에 나와 몸을 만들었고 등판하는 날엔 경기 전에 숫자 퍼즐을 풀며 집중력을 길렀다.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6500만 달러의 대형 계약을 맺었으나 거듭된 부상으로 성적이 부진하자 ‘먹튀’ 논란이 일었다. 마해영은 “FA(자유계약선수)가 되려고 스스로를 혹사한 후유증으로 부상이 잦았던 것 같다. 이적(移籍)한 첫해만이라도 몸을 좀 추스르면서 쉬었다면…”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미국 진출 3년 만인 1997년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박찬호는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하며 외환위기로 시름에 잠긴 국민에게 희망의 백구(白球)를 쏘아 올렸다.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에 화들짝 놀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야구 변방 한국으로 날아들었다. 서재응 김병현 봉중근 같은 ‘박찬호 키즈’가 속속 미국 무대를 밟았다. 메이저리그는 더이상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었다. 박찬호와 후배들은 야구 본고장의 거포(巨砲)들과 당당하게 맞서며 국가적 자긍심을 끌어올렸다.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