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이창기 (1959∼ )
한 사나흘 깊은 몸살을 앓다
며칠 참았던 담배를 사러
뒷마당에 쓰러져 있던 자전거를
겨우 일으켜 세운다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는데
웬 여인이 불쑥 나타나
양조간장 한 병을 사오란다
깻잎장아찌를 담가야 한다고
처녀애들 젖가슴처럼
탱탱한 바퀴에 가뿐한 몸을 싣고
나는 재빠르게 모퉁이를 돌아선다
근데
이미 오래전에 한 사내를 소화시킨 듯한
저 여인은 누구인가
저 여인이 기억하는,
혹은 잊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깊은 몸살도 잘 앓고 나면 좋은 점이 있다. 앓는 일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푹 쉰 데다가, 뜨거운 열로 살균 소독해서 전신이 가뿐해진다. 그런데 일시적인 부작용이 있다. 고열로 뇌가 살짝 멍해져서 그런가, 며칠 떨어져 있던 일상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 증세를 빌려 시인은 한 가족의 가장이며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자기의 사회적 자아가 불현듯 낯설어지고, 이런저런 관계에 ‘소화’돼버린 듯한 ‘나’라는 원초적 자아가 불쑥 고개를 내미는 심각한 순간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