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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폐족 친노’ 부활 전략의 한계

입력 | 2012-12-05 03:00:00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친노(친노무현) 세력을 ‘폐족(廢族)’이라고 처음 불렀던 사람은 안희정 충남지사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직후인 2007년 12월 26일 ‘우리는 폐족입니다’로 시작되는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렸다. 조선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스스로를 칭했던 폐족이라는 표현을 차용한 것이다.

실력으로 代案 못 되고 연대 몰두

그러나 정약용의 ‘폐족’과 안희정의 ‘폐족’은 성격이 다르다. 정약용은 자신을 총애했던 정조가 죽은 뒤 형제 친척들이 천주교 박해 때 사형 또는 유배를 당하면서 가족 전체가 궁지에 몰렸다. 개인적 불행이 정약용을 ‘폐족’으로 만들었다. 반면 안희정의 ‘폐족’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로 인해 민심이 등을 돌린 일에서 비롯됐다.

지난 주말 경기 남양주에 있는 정약용의 생가를 찾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배를 이용해 서울을 쉽게 오갈 수 있는 한강 상류 쪽에 많이 살았다. 그의 집도 한강변에 있었다. 정약용은 집 바로 뒤편 묘소에 잠들어 있었다. 올해가 정약용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여서인지 체험학습을 온 어린 학생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정약용이 유배를 떠날 때 그의 두 아들은 18세와 15세였다. 정약용은 이 집에 남아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폐족’과 ‘독서’를 강조했다. ‘우리 같은 폐족일수록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머릿속에 책이 5000권 이상 들어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유배로 벼슬길이 막혀버린 아들에게 ‘훗날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잡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는 절절함과 안타까움이 섞인 주문이었다.

5년 전 안희정 씨의 글 ‘우리는 폐족입니다’에도 과거에 대한 회한과 앞날에 대한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었다. ‘우리의 노력이 국민과 우리 세력 다수의 합의와 지지를 얻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성난 사자 우리에 떨어져서 그 울부짖음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사자 우리 안에 들어가겠습니다.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시간입니다.’

안희정 씨뿐이 아니었다. 당시 여권의 정동영 씨는 노무현 정권의 임기 만료를 앞둔 2007년 6월 “우리는 오만한 자세와 정체성을 둘러싼 공리공담, 파당 짓기로 서민과 중산층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며 “오늘의 참담한 민심 이반은 국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시키지 못한 업보”라고 고개를 떨궜다. 노무현 정권의 실세였던 이해찬 씨는 같은 해 8월 “비통한 심정이고 죄송한 마음이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근본 확립’ 강조한 ‘폐족 정약용’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명박 정권의 측근 비리와 낮은 지지율, 양극화 심화 현상 등으로 야권에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친노 세력을 계승한 민주통합당은 스스로의 실력으로 ‘대안 정당’의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주는 일보다는 야권연대에 몰두했다. 2007년 이후 의기소침해 있던 민주당은 2009년 4월 경기도교육감 선거에서 야권연대를 통해 김상곤 후보가 교육감에 당선되자 환호했다. 같은 전략으로 2010년 6월 지방선거,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승리가 이어졌다. 야권연대는 서로 합의만 하면 되니 손쉬운 일이었다. 진보 원로라는 ‘희망2013 승리2012 원탁회의’ 멤버들이 중재까지 해줬다. 올해 4월 총선은 민주당의 대승(大勝)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던 선거였다.

민주당은 올해 3월 10일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일찌감치 확정하고 총선에 나섰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야권연대는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편이 요구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시행 반대, 제주 해군기지 중단 같은 극단적인 정책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권 때 이뤄놓은 업적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었다. 이른바 진보 진영의 추한 얼굴도 공개됐다. 선거 부정이 횡행하고 있는 사실과 종북(從北) 색깔이 확연히 드러났다. 태극기와 애국가를 부정해온 일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런 세력과 연대했기 때문에 민주당은 그 짐까지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선에서도 안철수 씨와의 단일화에 더 매달렸다.

500권이 넘는 탁월한 저작을 남겨 후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정약용의 정신은 ‘위국애민(爲國愛民)’으로 요약된다. 정치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돌봐야 한다는 의미다. 정약용은 실행 방법으로 ‘근본’을 강조했다. 근본이 확립되어야 그 다음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아들에게도 이 점을 누누이 당부했다.

민주당이 올해 총선의 유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에 제1당을 내준 것은 ‘근본’보다는 야권연대에 집착한 탓이 컸다. 5년 전의 절박했던 마음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국민에게 신뢰감을 축적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총선 결과가 지난 5년간 민주당의 변신 노력에 점수를 매기는 1차 성적표였다면 이번 대선 결과는 최종 성적표다. 국민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하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