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시인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섬으로 고춧가루 장사를 떠나시곤 해서 나는 누이들의 등에 업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말이 없는 것을 늦둥이인 데다가 젖을 일찍 떼서 그렇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게다가 나는 도시로 일찍 올라온 편이었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애착이 유달리 강한 분이셨다. 시골에서 서너 달에 한 번꼴로 도회지로 올라와 자식들이 어떻게 사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셨다. 팔순이 되셨을 때도 팔남매의 집을 일일이 돌아다니시며,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 자식들의 생활을 건사하고 나서야 고향집으로 내려가셨다. 그것이 어머니가 일 년에 몇 번꼴로 치르는 자식 순례였다.
그 순례의 마지막에 항상 막내의 자취방이 있었다. 빨래부터 김장까지 노모는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을 하셨다. 내가 일을 끝내고 저녁 무렵에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방바닥의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고 계셨다. 방바닥의 머리칼은 방 빗자루보다 손바닥으로 쓸어내는 게 더 청소가 잘된다는 거였다. 나는 어머니가 밤에 잠이 드실 때를 제외하곤 내 자취방에서 편하게 누워계신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칠 년 전 네 번째 시집을 냈을 때 아버지를 잃었고 작년에 다섯 번째 시집을 내고 올봄에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는 들판에 나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시면 그저 조용히 방 안의 저녁빛으로 물드는 창호지 아래서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면도날로 깎아내는 분이셨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방바닥에 떨어진, 면도날로 베어낸 발뒤꿈치의 굳은살이 아버지의 설운 삶의 흔적인지 몰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장례식 기간에는 눈물이 안 나더니 어머니를 고향에 모실 때, 어머니를 하관할 때에야 허리가 끊어질 듯한 슬픔이 뭔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몸이 급격히 쇠약해져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혼자 걷지는 못했지만 내가 찾아가 부축해 드리면 나와 함께 요양원 복도를 산책하시길 좋아했다. 그때 어머니에게 내가 정말 살갑게 말했었나 보다. 어머니, 뭐 드시고 싶어요. 어머니는 도통 그런 말씀을 안 하시는 분이셨는데, 초콜릿이라고 하시며 웃으셨다. 하지만 나는 그 약속을 끝내 지켜 드리지 못했다. 그저 휴대전화에 ‘초콜릿’이라는 문자를 저장해 놓고 있었다. 어쩌면 그 말이 노모가 내게 그토록 듣고 싶었던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었을까. 자식은 언제나 때늦은 후회로 어머니를 되새기며 울 뿐이다. 그래도 이 못난 자식의 사랑한다는 뒤늦은 고백을 어머니는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와 함께 내려다보시며 받아줄 것이다. 살아생전 언제나 그러셨듯이.
박형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