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향숙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명예연구원
‘엔코드 프로젝트’는 한 인간을 만드는 생물학적 정보가 담긴 DNA가 대부분 다 쓸모가 있다는 결과다. DNA는 화학적 물질의 중합체로 당, 인산 염기,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염기는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 네 종류이고, 이들 네 가지 염기의 조합과 개수에 따라 생명체의 특징이 지어진다.
사람의 경우 2003년 완성된 인간게놈프로젝트를 통해 인간 DNA의 염기가 30억 쌍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세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단백질 등)을 만드는 정보를 담은 염기는 이 30억 쌍 중 5∼10%였다. 사람의 DNA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염기들이 어떤 정보도 생산하지 않는 쓸모없는 DNA, 이른바 정크(junk·쓰레기) DNA라는 것에 많은 이들이 실망을 했다.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몸속 세포의 유전자들이 제때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만약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겨 염기서열이 바뀌면 세포 기능에 이상이 오고 병에 걸릴 수 있다. 이번 연구로 밝혀낸 것은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정크 DNA도 염기서열이 바뀌면 세포 기능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정크 DNA가 실은 쓸모없는 DNA가 아니라 생명 현상을 조절하는 핵심 조절 인자일 수 있다는 얘기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라도 한 사람은 건강한 반면 다른 사람은 당뇨병, 고혈압, 암과 같은 질병에 걸리는 이유를 이 연구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지금껏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정크 DNA가 실제로는 유전자를 조절하는 아주 중요한 인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으로 이 정크 DNA는 암이나 당뇨, 고혈압, 우울증, 치매 등과 같은 복합 질병이나 여러 가지 유전병과 관절염, 심지어 키의 크고 작음 등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의 기능을 조절하는 핵심 인자임이 더 밝혀질 것이다. 또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약 개발의 새로운 대상이 될 것이다. 유전자가 어떻게 기능하느냐에 대한 이해를 더욱 폭넓게 할 수 있어, 암과 같은 복합 질병이나 유전병 등의 진단 및 예방 방법 개발에 한층 더 새롭게 접근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연구 결과는 제2의 인간게놈프로젝트로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과정을 유전자 조절 스위치들의 복합적 작용을 이해함으로써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발견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간 정부의 게놈 연구 지원이 일관성 있게 지속되지 않고 산발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세계적인 대열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쓸모없는 줄 알았던 정크 DNA가 이렇게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처럼, 지금까지 그늘에서 조용히 진행돼 왔던 한국의 게놈 연구 현황을 다시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엔코드 프로젝트에 버금가는 미래생명프로젝트를 기획하여 한국의 게놈 연구가 세계적으로 빛을 볼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유향숙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명예연구원